가정 중심의 교회를 세우라 - 신상래목사님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공동체’란 뜻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란 뜻과 조금 다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40여 년 동안 광야를 돌아다닌 무리들을 한글번역에는 광야교회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공동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광야교회라고 번역하니 좀 어색하다. 에클레시아를 한글로 죄다 교회라고 번역한 것은 아니다. 원어성경에는 바리새인들의 에클레시아도 있었고, 이방인들의 에클레시아도 있었다. 당연히 이때에는 교회라는 말로 번역하지 않았다. 바리새인교회나 이방인교회라고 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와 혼동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성경에서 말하는 에클레시아는 단지 공동체를 뜻하는 말이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특정한 교회를 뜻하는 단어는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교회는 원어성경에서 말하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뜻하시는 교회를 좀 더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풀이하자면, 성령이 내주하는 크리스천들과 성령이 내주하기를 갈망하는 크리스천의 공동체라는 게 좀 더 성경에 가까운 번역일 게다.
그렇다면 우리네 교회가 필자가 새롭게 정립한 교회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을까? 우리가 지금 다니는 교회가 성령이 내주하는 무리들과 성령을 사모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인가 말이다.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게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종교적인 예배의식을 비롯한 희생적인 신앙행위만을 반복하고 이를 추구하고 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은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에 충실하고 있어야 하는데, 알맹이는 없고 화려한 껍데기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교회건물만 웅장하고 럭셔리하게 짓는 데 몰두하고 있고, 교인들의 내면의 신앙을 성장시키기보다 교인들의 숫자가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양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죽어가는 양들을 살리고, 영혼이 병든 양을 치유하고, 잠자는 양을 깨우고, 방황하는 양들을 잘 양육하여 하나님 앞에 인도하여 가야하는 데 관심이 없다. 대신 양들이 내는 헌금만을 강요하고 독려하여 교회의 위상을 높이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부교역자를 뽑아 수많은 양들을 관리한 조직을 짜임새 있게 갖추고, 그들을 대량으로 교육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구축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단위의 농장을 설립하고 항공기를 방제하며 트랙터로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인 셈이다. 그렇게 교회를 엄청나게 크게 그리고 화려하게 키우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담임목사의 탐욕과 교만을 부추기고 조종하는 악한 영의 계략이다. 이러한 교회에서 사육(?)당하는 양들은 신앙이 질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병든 양들을 일일이 케어 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부교역자들은 교인들의 숫자만 세고 있는 담임목사의 눈치만 볼 뿐이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는데,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는 한 영혼에 관심 없이 대량 사육하는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들이 내는 헌금과 그들의 수효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겨 천국에 들이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이제 겨우 시작한 개척교회일까, 아니면 수백 명의 교인수를 가진 중견교회일까? 상가지하에 세를 얻어 이제 막 시작한 개척교회의 목회자는 중견교회를 꿈꾸고 있고, 중견교회의 담임목사는 하루빨리 대형교회로 키우는 것만이 관심사이다. 이들 교회는 교인의 수와 상관없이 대단위 농장만이 그들의 목표인 셈이다. 아마 이러한 교회에 소속되어있는 교인들은 대형교회의 목표에 올인 하는 담임목사의 전도전략에 시도 때도 없이 내몰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축교회를 짓는 엄청난 비용을 충당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거대한 건물을 지니고 있는 대형교회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적어도 건축헌금을 내놓으라고 시달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규모에 상관이 없이 몸집만 키우고 싶어 하는 교회와 그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부와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 모습은 가정중심의 교회이다. 가정중심의 교회는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에서 시작한 개척교회가 아니다. 가정을 중심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깊게 교제하는 기도를 하고 있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음을 얻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회개하고 경배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는 목사의 직분도 없으며 새벽기도회도 없고 예배의식 때마다 참석하고 헌금을 내야하는 부담도 없다. 가정중심의 교회는 가정에서 기도를 가르치고 배우며 말씀을 깨달으며 믿음을 성장시키는 교회이다. 이곳의 가장이 목회자이며 아내가 사모이고 자녀들이 장로이고 집사인 교회이다. 왜 가정중심의 교회가 세워져야 하냐면 작금의 우리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못한다고 신세한탄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교회 건물에 계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살아계시다. 교회만 철썩 같이 믿다가 천국문 앞에서 청천 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필자가 지금 다니는 교회를 그만 다니고 가정에 교회를 세우라는 게 아니다. 천국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되다는 뜻이다. 성령과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도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영혼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물론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소중하게 여기는 자녀조차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데, 팔짱만 끼고 교회에만 책임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들만 살려고 이미 배에서 뛰어나갔고, 스피커에서는 안심하고 있으라는 거짓방송만 흘러나오고 있는 중에도 이미 물이 차고 배가 기울고 있었다. 이미 사태가 심각한 것을 눈치 챈 사람들은 용감하게 배에서 뛰쳐나가 목숨을 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네 자녀들은 소중한 목숨을 죄다 잃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네교회가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가르치지 않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양육을 하지 않고 있는데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책임만 미루고 있을 것인가? 그 영혼들이 남이 아니라 당신의 소중한 가족들이고 자녀들인데 말이다.
가정에서 당신이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스스로 훈련하고 성령과 동행하는 영적습관을 들여 배우자와 자녀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사랑하는 가족들과 천국에서 영원히 같이 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가정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간절하게 찾으면 언제 어디서나 찾아오시는 분이다. 한글만 알고 있다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한다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하시는 보혜사(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돕는 자 뜻이다.)이시다. 당신이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어 당신의 삶에 적용하고 자녀들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도 우리네 교회방식으로 신앙을 배우지 않았다. 그들은 가정에서 부모에게 신앙을 배우고 성인이 되어 자녀들을 가르쳤다. 로마와 유대교인들의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닌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몇 명씩 모여 가정중심의 교회를 이루었다. 우리처럼 대형교회의 건물과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담임목사의 설교, 그리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없어도 놀라운 영적능력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성경의 인물들이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교회를 그만두고 나오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면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과 깊게 교제하는 교회를 가정에서부터 만들어나가라는 뜻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원한 천국에서 살고 싶다면 말이다.
출처 :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