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희는 - 신상래목사님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사랑이시고 자비로운 분이라고 들어왔다. 그래서 영접기도를 하고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내며 교회봉사를 하고 새벽기도를 다니면, 그 믿음을 기쁘게 여기셔서 천국의 자격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한 축복을 내려주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제 교인들은 그런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를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이고, 희생적인 신앙행위가 부족하니 더욱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라는 책망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며, 예배의식에 참석하거나 적당한 신앙행위를 반복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다. 건조하고 의미 없는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겁나는 일이고,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 재물을 들여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데도 지쳐서 더 이상 기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삶의 태도와 신앙의 방식에 대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대다수의 목회자의 설교에서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빛으로 그윽하게 바라보고 계실까, 아니면 까칠하고 싸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실까? 만약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신다면 자신의 고단하고 팍팍한 인생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고, 까칠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외면하고 계신다면 성경에 기록된 말들과 목회자들이 가르친 말들이 거짓이라는 뜻일 게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23:2,8,9,10)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6:2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6:35,3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시82:6,7)
아시다시피, 아담의 범죄한 이후에, 후예인 인류는 타락하여 죄성을 지닌 채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살아가고 있다. 죄성이란 본능적으로 죄를 좋아하고 죄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게 동물의 본능처럼 우리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다. 죄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말과 행동, 성품과 생각을 아우르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에 내버려두어 악한 영의 포로로 살아가게 된다. 악한 영들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하여 불행에 빠뜨려 고통을 주고 생명과 영혼을 사냥하여 지옥 불에 던져지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을 닮아 지은 인류의 고통소리를 견디다 못해,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조차 죄성이 사라진 게 아니기에,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은 물론,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 자녀들이라도 죄인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천국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성경을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가르치고 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3:1,2)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3:7)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위의 네 구절의 성경말씀은 공교롭게도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똑같이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처음으로 유대인에게 내뱉은 말씀이 바로 회개의 촉구였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신앙에 대한 성적표는 낙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선포를 겸손하게 받아들였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교만은 하늘을 찌르고 선민의식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엄청났다. 그런데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의 불에 들어갈 것이라는 선포를 즐겁게 들었겠는가? 그렇지만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며 섬뜩한 책망을 쏟아 부으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독사의 새끼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독사는 귀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직계후손으로 축복을 약속하신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귀신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게 하나님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는 무사 안일한 신앙생활을 즐기고 있다. 평일에는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탐욕스럽게 돈을 벌고 쾌락을 즐기는 데 번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지내다가, 주일이 되면 경건한 모습으로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와서 1시간짜리 예배의식에 참석해서 지폐 몇 장을 헌금바구니에 넣으면서 보험에 들 듯 천국의 자격을 확인하고 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즉시 탐욕을 채우고 쾌락을 즐기는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우리네 교회를 사랑하시기에, 자녀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며 자신의 구원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거라는 자기 암시를 하고 최면을 걸고 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11:20,2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대대로 축복을 약속한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를 밥 먹듯이 짓자,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받으시고 죄 사함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우습게 여기고 경멸하는 자들을 귀신들의 먹잇감으로 버리셔서 고통 받게 하시고 지옥 불에 던져버리셨다. 이렇게 원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나라 민족은 특별대우를 받으며 우리네 교회는 특혜를 얻는다고? 지나가던 개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은 죄다 지옥에 들어갔을 게 뻔하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고통에 신음하면서 강력한 왕의 출현을 기대하고 환호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자 예수님을 향한 환호는 분노로 변해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평소에 수만의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겨우 120명이 전부였던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할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신의 포로로 사는 것을 지적하고 죄의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삶을 실천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으로 기대한 것은 오산이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그간 해온 신앙행위를 근거로 들면서,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에서 믿음을 인정받는 자녀가 거의 없을 거라는 위의 말씀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대답은 명료하다. 지금까지의 세속적인 삶의 태도와 종교적인 신앙방식을 전부 바꾸고 새롭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러나 너희는’ 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물론이고, 기존의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는 종교인들의 신앙방식을 답습한다면, 독사의 새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신이 지금 심판대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마귀의 포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음이란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안에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육체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이 주시는 증거와 변화, 능력과 열매가 풍성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다면 잘라내어 불에 태워 버릴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세상 사람들과 종교적인 세상들과 구별하여 돌아서지 않는다면, 천국은 언감생심이며 평안하고 형통한 삶도 당신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는’이라는 말투를 반복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간절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전심으로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시라. 그길 만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의 영혼이 사는 길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