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 신상래목사님
껍데기는 가라 신 동 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 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 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부여가 고향인 신동엽 시인의 시비를 찾아간 적이 있다. 자그마한 동산에 그의 이력과 대표시를 돌에 조각해 놓았다. 그가 해방 후 혼란하고 암울한 시대에, 권력에 아부하며 백성들을 약탈하던 껍데기 인물들을 보며 쓴 시가 바로 위에 옮겨놓은 시이다. 그 이유는 우리네 교회에도 허접 쓰레기 같은 껍데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왜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껍데기인 형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평신도들에게 성경이 주어지지 않는 중세시대의 가톨릭교회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이 우리 손안에 있어서 읽어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껍데기와 알맹이를 가려낼 수 있는데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어리석고 무지한 교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고, 악한 영들이 교회 지도자의 머리를 타고 앉아 자신들의 생각을 넣어주며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에서 얼마나 껍데기에 치중하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작금의 우리네 교회 가장 많이 하는 신앙의식이 무엇인가? 바로 예배의식이다. 새벽기도회에도 간단한 예배의식을 시행해야 하고, 주일 오전에 드려지는 예배는 주일성수라는 말에 덧붙여져서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행위로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주일에는 무려 두 번의 예배의식이 치러진다. 수요일이나 금요일에도 예배의식이 있고, 구역마다 모여서 드려지는 예배의식도 교인이라면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예배의식과 예배는 다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의 지체들이 모여서 예배의식을 드린다면, 이 역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참석한다고 예배가 되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일상의 삶에서 찬양하고 감사하며, 쉬지 않고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는 기도의 습관을 말한다.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셔서 즐겁고 기쁘게 채워져야 한다. 그런 기도의 습관이 없이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내몰리는 것이 바로 껍데기이다.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는 알맹이인 예배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껍데기인 예배의식만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참석하기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예배의 삶의 없는 이들은 하나님이 관심조차 없다. 그런데 어떻게 천국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로 많이 하는 껍데기가 바로 교회봉사이다. 교회봉사를 해야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교회란 교회 건물이 아니라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건물이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 어떻게 알맹이가 될 수 있겠는가? 교회규모가 클수록 수많은 비본질적인 일에 교인들이 동원되어 파김치가 되고 있다. 이런 이들이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 이렇게 하나님을 깊고 친밀하게 만나게 하지 않고, 교회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온갖 껍데기 같은 일을 하느라고,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교회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세 번째 껍데기는 전도행사이다. 각종 전도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교회의 전도조직에 소속하게 하여서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데려와서 교회의자에 앉히는 게, 바로 작금의 교회에서 시행하는 전도의 모습이다. 그렇게 교회 의자에 앉히면 영혼이 구원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가? 목회자들은 단지 교회에서 정하는 예배의식에 참석하여 헌금을 드리는 교인들이 되는 것에 만족한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지 못하면 천국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다. 제자가 누구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소유를 버리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이들이다. 그런 제자를 양육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단지 교회에서 시키는 각종 예배의식과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기만 하는 목사의 종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런 행사는 전부 지옥자식을 만드는 행사에 불과하다. 자신들도 지옥에 떨어지고, 감언이설로 꼬드겨서 교회에 데려온 사람들도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게, 작금의 우리네 교회의 전도의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네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본질적인 믿음의 삶은 가르치지 않고 형식적인 예배의식과 희생적인 희생행위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에서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형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고 있다가는, 머지않아 유황불이 이글이글 타는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비본질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그만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본질적인 믿음을 추구하기 바란다. 그래야 당신의 얼굴을 천국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