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데, 왜 목숨을 걸어야 하냐고? - 신상래목사님
성경을 읽어보면 현실에 맞지 않는 듯한 얘기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기적과 이적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이미 적응(?)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말씀하시는 구절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말씀을 대하면 어물쩍 대충 넘어간다. 그런 말에 하나하나 과도하게 신경을 쓰면 신경쇠약에 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은 작심하고 이 말씀에 대해 파헤쳐보겠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막8:35~37)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4~46)
위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천국에 가려면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뭐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야 한다는 의미를 아는 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면서, 그런 결연한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가? 이런 필자의 질문에 마뜩찮은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필자가 성경말씀을 너무 직설적으로 받아들인다면서, 말꼬투리로 딴죽을 거는 이단의 부류쯤으로 치부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목숨을 걸라는 게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생명을 무릅쓰고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정황은 성경이 기록되었던 초대교회가, 박해의 한가운데 있었던 상황을 고려하면서 받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로마당국과 유대교의 박해가 끔찍할 정도여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면 목숨은 물론 직업과 고향, 가족까지도 전부 버려야 했던 이들이 허다했다. 그래서 도망치다가 잡히면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잃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 걸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드러내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표정관리를 하면서 깊은 속내를 감추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천국의 백성이 되려면 죽도록 충성해야하며,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게, 비단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특히 기독교가 기득권층이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예수를 믿는다고 불이익을 받거나 차별을 당할 일이 결코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대하면 결심을 다지거나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다.
아니라고? 자신은 목숨을 걸고 죽도록 충성하고 있다고? 오홋 그런가? 그래서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배의식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은 물론, 새벽기도에 십일조, 각종 교회봉사를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아예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수입의 상당부분을 교회에 헌금으로 드리고 있다고? 물론 이런 희생적인 신앙행위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은 목회자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할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식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교회조직을 유지하고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 봉사하는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내용이 성경에 없는 게 아쉽다. 솔직히 그런 신앙행위들은 차 순위에 들어있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우리네 교회가 시행하는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보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도구로 사는 것이 더 우선순위이고, 교회조직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한 봉사의 행위들은 정말 의미 없는 것들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종교건물을 키워서 교세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더욱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행위도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다가 앉혀 놓은 게 전도가 아니라, 사탄의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고 성령과 동행하는 제자들을 양육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전파이고 전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는 본질적인 것은 제쳐놓고, 이렇게 비본질적인 신앙행위에 몰두하게 하여 인생의 짐 위에 신앙의 짐을 더 얹고 있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시행할만한 본질적인 신앙행위들이 무엇인가? 매일처럼 새벽기도회에 나가고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하며,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판과 공원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손을 끌고 교회의자에 앉혀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생기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녀들에게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귀신들의 포로 된 자녀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죄다 기적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날마다 성령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죽기 살기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전심으로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깨어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고, 사도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으며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게 죄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일을 제쳐 놓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려면,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는 목회자를 포함해서 이런 교인들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으며 전 재산을 팔아 천국을 사려는 이들이 없는 이유이다. 일전에 성령께서 모든 인구 중에 천국에 들어가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혀를 끌끌 차시며 말씀하신 것과 기가 막히게 오버랩 된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