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당신의 속내를 지켜보고 계신다 - 신상례목사님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일처럼 숙제가 있었으며, 그 숙제를 해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받아쓰기 시험에서 틀린 문제나, 국어책을 반복해서 쓰는 숙제를 하느라 팔이 떨어지게 아픈 기억이 새롭다. 검사를 받아야 하는 부담이 어린 시절에도 상당한 인생의 짐(?)으로 느껴졌던 탓이다. 그래서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의 취향에 따라 적당히 숙제를 하는 요령(?)이 생긴다. 자세하게 검사를 하지 않은 선생님이라면 예전에 했던 것을 새로 한 것처럼 붙여서 속이거나, 반복 횟수를 적당히 줄이는 방법을 채택하기도 한다.ㅎㅎ 그러나 숙제검사를 꼼꼼히 하며,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에게 혹독한 벌을 주는 선생님이라면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 다른 수가 없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상태를 어떻게 지켜보는 분이신지, 그 성향을 꼼꼼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맞춤형(?) 신앙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모든 관점은 교회에서 배운다. 아무리 세상지식이 많고 풍부한 경험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도 교회에 오면 새로운 세상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천사, 사탄과 귀신이라는 영적인 존재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를 다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면 세상의 지식과 경험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절대적으로 목회자의 말에 순종해야 하며,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나 대언자라는 영적 권위가 대단하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서는 똑똑하고 총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조차도 교회에 오면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끝없는 소모전에 말려들기 싫어서 일부러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째든 교회에 오면 아무리 성경에 있는 말들이라도, 목회자가 해석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하는 사탄의 자녀라든가,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저주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읽힌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드높은 지위와 신분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오면 주일날 예배시간에 잠시 얼굴을 비치고 이내 사라지기 십상이다. 어쨌든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판정은 담임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뜻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말해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모습은 무엇일까? 교회에 1년만 다닌 사람이라면 죄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참에 필자가 한번 말해 보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 오전예배는 필수이고, 오후에 열리는 예배의식에도 적극적으로 참석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수요예배나 금요예배에 나오면 가산점이 붙기 마련이다. 또한 십일조를 비롯한 교회에서 요청하는 헌금을 적극적으로 내야한다. 헌금자의 이름은 설교시간에 호명되고, 자주 그리고 많이 낸 사람일수록 신앙이 견고하다는 칭찬이 곁들여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교회를 신축하거나 리모델링을 한다든가, 교육관이나 수양관을 건립하는 데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게 되면, 전교인 특히 직분자들의 몫이 직분의 중요도에 따라 배분되기 마련이다. 여기에 참여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면 신앙심이 혹독하게 비판을 받는다. 또한 교회봉사, 각종 기도회의 참여, 새벽예배에의 참석여부가 신앙심의 척도로 가산점이 붙으며, 담임목사의 심방이나 교육행사, 교단에서의 선거, 기타 개인적인 부탁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어지는 특혜의 수혜자가 된다고 설교단상이나 개인적으로 통보받는다. 이와 같은 교회의 기준이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과 상급은 물론, 이 땅에서 축복을 받고 형통하게 살게 되는 하나님의 기준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런가? 그러나 아쉽게도 이 같은 기준은 성경에 없는 내용이다. 목회자가 성경을 바탕으로 해석한 평가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판단의 기준이나 척도가 자의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해석일 뿐이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즉각 하나님의 종의 말에 불순종하거나 성령을 훼방한다는 딱지가 붙기 때문에, 교회를 나가지 않을 바에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게 불문율로 여겨지고 있는 게, 우리가 마주한 교회의 실상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준은 겉으로 드러난 희생적인 신앙행위의 척도로 재는 것뿐이다. 그러나 귀신들도 사람의 생각을 좍좍 읽어내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겉으로 드러내는 신앙행위만을 보고 판단하실 리는 만무하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람의 속내가 생각, 목적이나 동기를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시다. 아무리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열정적으로 반복하고, 예배의식에 수도 없이 참석하고, 엄청난 금액의 돈을 교회에 헌금으로 드렸을 지라도, 그 속내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다윗은 간음죄를 덮으려고 우리야를 죽여 완전범죄를 노렸지만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극악무도한 죄를 책망 받아야 했고, 아니니와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인 죄로 죽음을 면치 못했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여준 드높은 종교적인 희생행위는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는 혹독한 책망으로 되돌아왔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불꽂 같은 눈앞에서 죄악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당신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도 다르지 않다. 그간의 신앙행위가 탐욕을 앞세우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그런 말을 듣기 어렵다. 오직 겉으로 드러난 신앙행위에 대한 담임목사의 칭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은 심판대 앞에서 이 땅에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한 정산(精算)을 할 날이 온다. 그 앞에서는 그동안 행한 신앙행위의 내면에 숨은 동기와 속내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행한 아름다운 선한 행위는 칭찬을 받고 의인으로 여겨져, 천군천사들의 환호성속에 천국에 들어가며 엄청난 상급이 안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칭찬은 들었는지 모르지만, 교만과 자신의 의를 앞세운 신앙행위는, 죄다 까발려져서 혹독한 책망과 함께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이다.
아직도 돌이킬 기회가 남아있는 지금, 숙제를 다시 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사람들의 칭찬을 기대하고 담임목사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하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을 묵묵히 행하시길 바란다. 그래야 당신이 선한 이웃이 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