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애벌레가 알에서 깨어나자 수많은 애벌레가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자신도 뒤질 새라 부랴부랴 그들의 뒤를 쫓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에서 숨을 헐떡이며 가는 애벌레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애벌레는 귀찮다는 듯이, 자신도 잘 모르지만 목적지에 닿게 되면 알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열심히 갈 길을 재촉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갔어도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중도에 포기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지금까지 온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다시 힘을 내곤했다. 그러다가 정말 힘이 다 빠져 한계에 다다라서 도저히 더 이상 갈수가 없어 포기하려고 하던 찰라, 목적지에서 돌아오는 애벌레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눈이 번쩍 뜨여서, 다급하게 그 애벌레에게 가서 도대체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애벌레는 피곤에 덮인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는,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들릴락 말락 하게 말하고는 가던 길을 가버렸다. 위의 얘기는 필자가 학창시절에 읽은 이야기책의 내용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올바른지 알지 못한 채, 남의 뒤를 따라 허둥지둥 가고 있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당신의 인생은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가? 암요암요, 천국에 가려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요. 이대로만 가면 천국의 자격은 당연하고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하게 살게 될 것을 의심치 않아요. 그게 바로 믿음 아니겠어요? 오홋,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에 비하면 당신은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담임목사나 선배교인들이 시키는 대로, 그들이 가는 대로 열심히 가기만 하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건강한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가?
솔직히 말해보자. 아니라면 아닌 것이고, 없다는 없는 것이다. 필자의 20여년의 신앙생활은, 위의 애벌레처럼 다른 사람들의 뒤를 열심히 뛰어간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실패뿐인 인생이었다. 물론 실패한 인생이라고 해서, 필자가 추구한 삶과 신앙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추구한 삶과 신앙의 방식의 근거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 와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이 전부였다. 교회에서 시키는 것이, 죄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철썩 같이 믿었다. 필자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앙방식이 성경적이었는지, 성경의 약속대로 성취되었는지 찬찬히 살펴볼 성경지식이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서 믿은 선배교인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따라 열심히 뛰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너무 젊은 시절에 사업실패라는 인생의 암초를 만나 보기 좋게 떠내려갔다. 아마 안락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젊은 시절을 살아갔더라면, 그 길을 좀 더 오랫동안 뛰어갔을 게 뻔하다. 그러나 너무 일찍 인생의 수렁에 빠져, 더 이상 신앙선배들이 간 길을 뒤떠라 갈수가 없었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인생의 낭떠러지에서 발버둥 치면서, 그동안의 신앙방식을 곱씹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10여년을 떠내려가면서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삶과 신앙의 방식이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과도 동떨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교회에서 목회자가 시키는 대로, 선배교인들이 가는 길을 열심히 뛰어갔을 뿐이다. 그 신앙은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 주일 성수에 십일조, 각종 교회봉사, 새벽기도회의 참석으로 대표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신앙방식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 너무 허탈하였다. 물론 그런 신앙방식이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예배의식에 참여하거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한다고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보다는 마음의 속내나 동기, 목적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품이나 속내, 동기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주요한 잣대는 성령의 내주에 대한 증거였다. 교회에서는 1분짜리 신앙고백을 하고 주일성수를 하면 성령이 안에 들어오신다고 가르쳤다. 그 증거가 바로 방언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필자가 다녔던 교회는 통성 기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필자는 어렵지 않게 방언을 경험하고 그 뒤로부터는 방언으로 기도했다. 방언뿐 아니라 방언 찬송도 유창하게 했으니,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 영혼의 기쁨이 차고 넘치지 않았으며, 성품과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며, 하는 일마다 잘되기는 고사하고 실패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린 인생뿐이었다. 그게 성령이 내주하는 증거이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겠는가? 그러나 다니던 교회를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교회분위기 때문이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고단하고 팍팍한 시간으로 채워지면서, 필자에게 성령이 안계시다는 증거는 더욱 명백해졌다. 한번 성령이 들어오시면 절대로 떠나가지 않으신다는 데,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하고 고통스러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을 떠내려 가다가, 기회를 부여잡고 기도의 강을 건너가면서 또 다시 15년이 흘렀다. 죽기 살기로기도의 습관을 들이면서 성령이 내주하는 증거와 열매를 경험하면서, 그간의 신앙방식이 얼마나 허접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물론이다. 성령이 계시지만, 성령의 증거나 열매도 없고 기도의 능력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대다수의 우리네 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허접스러운 신학자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앞선 신앙선배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이들의 결과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의 신앙행위는 아무 것도 없는 허구만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들의 종착역은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시절의 사업실패가 한없이 고마울 뿐이고, 일찍부터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는 기복적인 신앙방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할 뿐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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