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
[개 요]
주제-이 시는 맨 처음 나오는 “참회의 시”로 알려져 있다. (다른 여섯 편의 참회의 시는 32, 38, 51, 102, 130, 143편이 있다.) 이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참회하는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여기에는 슬픔(3, 6, 7절)과 부끄러움(2, 4절), 그리고 죄에 대한 미움(8절)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설 때 분명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오, 성령님이여! 우리 안에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이다. 스미닛은 제8음으로서 한 옥타브를 말하는 듯하다(참고. 대상 15: 21).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베이스나 테너를 지칭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시의 탄식하는 어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고대의 음악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도 “셀라”의 의미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도 이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학자들도 시편에서 아직도 많은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시편들이 고대에 쓰였다는 것을 증거하며, 다윗 왕이 이 시를 기록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구성-이 시는 두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1-7절심한 어려움 중에 시편 기자가 간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8-10절첫째 부분과는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어조를 바꾸어 단음을 버리고 장엄한 곡을 취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선언한다.
[강 해]
1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첫번째 부분을 읽어 보았다. 이제 한 절, 한 절씩 살펴보도록 하자.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시편 기자는 그가 당연히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곡식을 추수할 때 바람을 일으켜 깨끗한 알곡을 모으지만, 영혼은 견책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다." 우리를 징계하여 영혼을 부요케 하는 그 존귀한 손을 떠나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이 견책을 그만두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견책은 축복이 위장을 하고 오는 것인데, 이것을 놓칠 수는 없다. 그는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라고 기도했다. 주여, 주께서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처럼 나를 대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이 낙담하여 절망할까 하나이다.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렘 10:24). 내가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나이다. 내가 징계의 회초리 앞에서 몸을 움츠리지만, 이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나이다. 그러나 오, 내 하나님이여,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당신의 회초리가 변하여 칼이 되며, 당신이 나를 칠 때에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징계를 온전히 거두어 들이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노 가운데서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사랑 가운데서 징계하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2, 3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당연히 멸망당해야 하오나, 당신의 자비로 내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선함, 우리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말고, 우리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말하며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라:"여호와여, 나는 연약하나이다. 나를 부수지 마시고 내게 힘을 주소서. 나는 연약한 그릇이오니, 내게 진노하지 마소서. 나는 시들어가는 가련한 꽃과도 같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자비롭게 대하시고, 나를 꺾지 마소서. 나는 연약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교만한 마음이 꺾였다. 그래서 자신이 율법을 지킬 힘이 없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슬픔으로 인해서 연약해졌고, 약속을 부여잡기에도 너무 연약해져 있다:"나는 수척하였사오니." 원문은 이런 의미이다:"나는 고개를 숙인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뿌리 뽑힌 나무가 시들어 가는 것과 같다. 아!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영광에는 흠이 갔고, 우리의 아름다움은 시들어 가는 꽃과도 같았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고통을 받던 병에서 잠시 동안 진정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고 병의 근원을 고쳐 달라는 기도이다. 뼈가 '떨린다'는 말은 히브리 표현을 따르자면 뼈가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는 이처럼 공포에 휩싸여 그의 뼈조차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의 골격을 유지해 주는 뼈가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내 뼈가 떨리나이다." 아! 우리의 영혼이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아래에는 지옥의 불꽃이 타오르고, 위에는 진노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주위에는 위험과 의심이 둘러싸고 있다면, 머리털이 서고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 뼈가 떨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 외부로 나타난 표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영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내 영혼이 평안하고, 단지 뼈만 떨리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고통을 당한다면, 이는 정말 깊은 고통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다윗은 이 말을 짤막하게 외쳤다. 말로 그의 심정을 다 표현할 수 없고, 슬픔이 그에게서 모든 위로를 다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아직도 소망을 품고 있다. 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래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친 것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가장 바라는 바는 은혜로운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소망이다.
칼빈은 종종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쳤다. 그가 괴로운 삶을 사는 동안 겪었던 그 고통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천년 왕국의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외칠 말이다:"오, 여호와여! 그분이 타시는 말은 왜 이렇게 오지 않나이까?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자들이 아직 용서함을 받기 전에는 일 분이 한 시간 같고, 한 시간이 일 년 같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은혜의 해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영혼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외친다:"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으므로 고난과 비극이 생겼다. 이제 그분께서 돌아오신다면 다윗은 고난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어떤 손을 부여잡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왼손을 붙잡지 않았다. 자비를 행하시는 그분의 오른손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많아서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이 간청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하나님은 이 간청을 결코 거절하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의지한다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분께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이 1-4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는지 주의해서 살펴보라. 그는 다섯 번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분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변치 않으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에 나타나 있다. 그분의 이름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이제 다윗은 사망의 위험에 빠져 있다. 이 사망은 일시적인 사망을 말하고, 또한 영원한 사망을 말할 수도 있다. 5절을 읽어 보라.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무덤은, 그것이 교회에 있다 해도, 침묵의 장소이다. 무덤 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흙에 덮인 육체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리시면 내가 찬양하리이다. 내가 죽는다면, 이 육신으로 드리는 찬양을 일시 중단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나이다. 그리고 내가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한다면, 나는 결코 당신께 감사의 노래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지옥의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어찌 감사의 노래가 울리리이까. 내가 영원한 저주를 받아도 여호와는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찬양하는 인생 중에서 한 사람이 궐이 날 것입니다."
아! 두려움으로 떠는 성도들이 있는가? 우리 여호와께서 당신을 도우사 다윗처럼 간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죄인이 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자들은 복을 받고, 용서를 받는 자들도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6, 7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시편 기자는 그의 길고 긴 고통을 토해 낸다. 그는 탄식하다가 마침내 목이 상하기까지 했다. 그는 진력을 다하여 노동을 하듯이, 부르짖으며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탄식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할 수는 없다. 그렇다! 성도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탄식해야만, 구원의 날에 기쁨의 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밤이란 만물이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고, 내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이 시간에도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면, 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흐르는 눈물이 너무 많아 내 침상으로 물 위에 뜨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실제로 일어났다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묘사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심판을 생각하며 현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노인의 눈이 해가 바뀌면서 어두워지듯이, 그의 눈이 눈물로 충혈되고 어두워졌다고 다윗은 말한다. 죄책감은 이처럼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 고통을 받게 한다. 아일랜드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발작을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손이 다윗을 누르시니 다윗이 노쇠해지고,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낄 때에 땅에 엎드려 우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아!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 시의 표현은 억지로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처럼 슬픈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이다.
8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8절. 지금까지 시편 기자는 슬픔 가운데 울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당당히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두려워 떠는 성도들이여, 수금을 들어라
슬픔을 떨치고 노래를 불러라.
슬퍼하고 탄식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라. 그러나 슬픔의 시간은 짧게 하라. 네가 빠진 구덩이에서 일어나라. 이제 그만 일어나라. 네 베옷과 재를 떨쳐 버리라. 밤에 울었을지라도, 낮에는 기쁨이 찾아오리라.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다윗은 평안을 찾았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집에서 악인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악한 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그와 충분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라. 너와 아무 상관도 하고 싶지 않다." 참회하는 자는 생활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성전이 파멸된 것을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채찍을 들고서 마음의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쫓아내고,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 버려야 한다. 용서받은 죄인은 구세주의 피를 흘리게 했던 죄를 미워해야 한다. 은혜와 죄는 이웃이 될 수 없다. 둘 중에서 하나는 이사를 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인의 아름다운 사상이 들어 있다. 또한 번역에도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흐느낌에도 목소리가 있는가? 흐느낌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언어로 의미를 전달하는가? 흐느낌은 이 땅 어느 곳에서든나, 그리고 하늘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이든 종이든 자유자이든, 모든 사람이 흐느껴 울 때에는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다. 흐느낌은 슬픔을 표현하는 유창한 언어이다. 그는 유창한 변사이다. 그의 말은 어떤 통역도 필요없이 누구나 이해한다.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눈물이 표현해 내다니! 이는 정말 감미로운 일이 아닌가! 눈물은 액체로 만들어진 기도라고 생각하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을 때, 흐느낌은 이 모든 장애물을 치운다. 그리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직통으로 나아가 간구하는 기도를 방울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말로 간구할 수 없을 때, 내가 흐느껴 울리이다. 당신은 내 울음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성령께서는 시편 기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주셨다. 이것은 성도들이 때때로 누리는 특권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다가 그의 골방에서 뛰어 나와 이렇게 소리쳤다:"우리가 이겼네! 우리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환상적인 꿈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확신을 주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는다 해도 우리는 그 실재를 알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기자는 과거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해 격려를 받는다. 이전에는 "들으셨음이여"라고 과거의 체험을 말했으나, 여기서 더 나아가 "받으시리로다"라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 논리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이와 같은 논리를 모방하라.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이것은 원수들을 저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물러갈 것이다." 그들이 사망과 죽음을 당할 것은 확실하고, 이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칠 것이다. 로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복수의 신은 그 발을 양털로 감쌌다." 복수는 그 원수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서 갑자가 후려쳐서 넘어뜨린다. 이 구절이 저주를 말한다면, 구약 시대의 언어와 신약 시대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그들을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바른 길로 걷게 하신다.
이 시도 앞의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자와 악인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오, 여호와여!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까지 당신의 백성 중에 속하게 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시 6편 전체. 다윗은 질병과 원수들의 박해로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시편에서 그가 받은 고난에 대해 살펴보면, 그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아프거나 핍박을 받을 때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신이 지은 죄를 기억했다. 이 시도 그가 병들었을 때 기록했으나, 8절 이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그의 영혼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 큰 강에 합류하면 그 특성이 변하는 것처럼, 다윗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이처럼 그 특성이 바뀌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신체적 질병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으나, 이제는 영혼의 위독한 상태와 두려움 아래서 슬픔을 표시한다. 이와 같은 시는 시 38편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리처드 길핀(Richard Gilpin, 1677).
1절.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순종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 첫째는 말로 그들을 견책하시고, 둘째는 매로 그들을 징계하신다. 그분은 먼저 말씀으로 견책하시는데,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분의 종을 보내셔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잘못을 범한 아들을 먼저 말로 견책하듯이, 하나님도 먼저 말씀으로 책망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하나님은 선한 아버지처럼 채찍으로 그들을 징계하신다. 우리 구세주께서도 동산에서 세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말씀으로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경계를 받지 않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경계하여 깨우고자 하셨으나 실패한 것을, 이제 유다와 그의 무리들이 그들을 깨우러 왔다고 했다. -아치볼드 심슨(Archibald Symson, 1638).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그는 하나님의 견책과 징계를 모두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옳은 일이 아니다. 견책과 징계가 없다면, 이는 그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로운 것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죄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다윗은 분과 진노 대신에 아버지의 온유한 견책을 바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런 견책과 징계를 기꺼이 받고자 한다. -존 칼빈(1509-1564).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여호와의 분노라고?
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폭풍과 같은 그분의 분노를 어찌 견딘단 말인가!
그분의 심판을 피해 어디로 도망을 가랴
십자가로 도망하라!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화목이 죄인을 둘러 보호하리라
태양을 가리던 검은 구름이 떠나가듯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얼굴에서 떠나리라.
-작자미상.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나를 율법을 따라 심판하지 마소서.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실 때 분노하신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호 11:9; 참조. 마 3:11).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진노하겠다고 하셨으나, 이제는 진노하지 않으며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악인을 심판하신다. 그분은 이것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실행에 옮기신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을 실행하실 때에 이 진노가 나타난다. -리처드 스톡(Richard Stock, 1641).
1절.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당신께서 내리시는 징계의 채찍을 받을 때에도
내 안에 생명과 평강을 지키게 하소서!
나를 죽이지 마시고, 내 죄를 죽이사
당신은 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내게 베푸실 영광을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알게 하소서!
마지막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외치게 하소서
"오, 주여! 오소서, 주를 신뢰하나이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2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했으나, 다윗은 하늘과 땅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치신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 치료를 받고자 한다. 그는 아담처럼 숲으로 피신하지 않았고, 사울처럼 영매자에게 가지 않았으며, 요나처럼 다시스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로 피했다.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피한 것이다. 분노한 필립 왕에게서 유죄 판결을 받은 여인은,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필립 왕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품인 공의에서 또 다른 덕스러운 성품인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다.인간의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상고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게 상고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분의 자비로운 심판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마지막 상고의 장소이다. "내게는 하늘에서도 주밖에, 땅에서도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나이다."······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대할 때에 그랬던 것처럼, 다윗은 자비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얻었다. "내가 자비를 얻었으니, 이제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나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는가? 자비를 구하라. 이 샘에서 다른 모든 좋은 것이 흘러나온다. -아치볼드 심슨.
2절.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다윗이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어떻게 말하는지 주의해 보라. 그는 "내가 수척하였사오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들어서 하나님을 움직이려 했다. 이것은 사람을 움직이기에는 약한 논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논리이다. 병든 자가 의사에게 와서 그가 치명적으로 아프다는 것을 호소하면, 의사는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서 당신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자가 재판관에게 가서 그가 당한 모든 일을 말하고 조언을 구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상인에게 가서 무엇인가 사기를 원한다면, 그 상인은 돈을 요구하거나 보증서를 요구할 것이다. 또한 왕이 신하들의 충성을 원하다면, 무엇인가 그들에게 보상할 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겠는가? 우리의 가난과 눈물, 비참함과 무가치함을 고백한다면, 그분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우리가 비극적인 일을 당해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꿰뚫는 화살과도 같아서, 그분은 우리가 곤란한 환경에 처한 것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실 것이다. 걸인들은 신체적으로 연약하고 다친 부분을 노출하여 사람들에게서 동정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비극적인 상황을 주께 알리자. 그리하면 우리의 상처를 보시고, 자비를 베풀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다. -아치볼드 심슨.
2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온 것은 그의 병이 깊고, 그가 당한 사고가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깊은 병에 걸리고 큰 사고를 당했기에 "나의 뼈가 떨리오니······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두번째 간구를 드린다:"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존 던.
2절. "나의 뼈가 떨리오니."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우리의 신체에서 가장 강하고 둔감한 부분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의 뼈가 떨렸다. -데이비드 딕슨.
2절. "나의 뼈가 떨리오니." "뼈"는 시편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조사해 보면, 세 가지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 "뼈"는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육체를 말한다:"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 22:16, 17). (2) 이 단어는 때로 그분의 신비스런 몸, 즉 교회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믿음 안에 굳게 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들, 핍박이나 시련이나 어떤 혹독한 압제로도 쓰러뜨릴 수 없는 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시 35:10). (3) 어떤 구절에서는 "뼈"가 성도의 영혼이나 속사람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그것은 바로 시편 6:2에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 갖게 되는 불굴의 용기, 영혼의 힘과 강건함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어거스틴, 암브로스, 크리소스톰(Augustine, Ambrose, Chrysostom, Parochial Lectures on the Psalms<1855>에서 던웰<F. H. Dunwell>이 인용함).
3절. "나의 영혼." 죄의 친구는 고통의 친구이다. 죄인의 영혼은 죄에 대한 뜻을 품는 자요, 몸은 이를 행하는 자이다. 죄의 뜻을 품는 자와 행하는 자, 원인 제공자와 도구는 모두 심판을 받는다. -존 던.
3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기에서 세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십자가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이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시간을 정한다거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제한하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 잠잠히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30년이 차기까지 애굽에서 지내야 했다. 요셉은 구원받기까지 정해진 시간, 3년 반을 감옥에서 지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을 지내야 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언제 금식하고, 언제 식사를 조절하며, 언제 휴식을 취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고난과 영광의 시간을 아시고 정해 주신다.
둘째,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조급해 한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영을 거스리며, 하나님과 변론하고 다투게 된다. 이것은 욥과 요나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여기서 다윗도 그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여호와께서 성도들을 구원하시는게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시는 큰 이유가 있다. 우리가 죄중에 탐닉하고 있을 때, 그분은 선지자들과 종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오, 바보들아, 이 어리석은 짓을 어느 때까지 계속하겠느냐?" 그때에 우리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한 날이 일 년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해도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분이 외치실 때 우리가 듣지 않았다면, 이제 우리가 부르짖어도 그분이 들으려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아치볼드 심슨.
3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라고 묻는다. 원수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신원하는 기도는 우리의 임의로 한다거나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시적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처럼, 신원하는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도이며,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기도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분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는 그분의 뜻을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촉진시키는 기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고치고자 하시는 것을 저항하지 말고,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분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도 바로 이것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분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은 우리로 그분께 순복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분의 손 아래서 겸허하고,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하자:"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미 7:9). 이때에 그분은 만족하사 죽음의 천사에게 말했듯이 심판의 천사들에게 "이제 됐으니 그만하라"고 말씀하시고, 칼을 거두시듯이 채찍을 거두실 것이다. -존 던.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다윗은 멀리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가까이 있는 것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을 포위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는 이 시의 서두에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마실 것을 기도했다:"나를 견책하지 마소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이렇게 작은 것을 부탁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한 가지 간구를 드리며, 하나님을 움직여 마침내 하나님을 이겼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응답을 받자, 이제는 더 가까이 나아가 신원하는 기도에서 요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마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무엇인가 행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하나님은 선례를 따라 행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비밀을 알았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먼저 계셨던 선임자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임자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신의 선례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선례를 따라 행하신다. 예전에 행하신 것처럼 지금도 행하시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무엇인가 받았던 자에게는 더 주신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달라는 자를 기뻐하시고, 하나님 자신과 겨루는 자에게 지기를 기뻐하신다. 그분은 이전에 행했던 대로 행하시며, 자신의 본을 따라 그대로 행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이전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를 기뻐하신다. 이후의 자비는 이전의 자비보다 더 크다. 그래서 다윗은 후에 드리는 요청하는 기도에서 전에 드렸던 신원하는 기도보다 더 큰 것을 간구한다:"여호와여, 돌아오소서. 내 영혼을 건지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존 던.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나와 화목하소서. 내가 여호와와 화목하기 전, 내가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에 주께서 내 생명을 취하신다면, 당신에게 이것이 무슨 영광이 되겠나이까? 주께서 나를 살리시고, 내가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여 주님의 은총을 얻는 것이 당신께 무한히 더 영광스럽지 않겠나이까? 그렇게 해 주시면, 내가 살아서 당신의 자비와 은혜를 찬양하고 높이리이다. 이처럼 큰 죄인을 사하시는 당신의 자비는 무한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고백하며 당신께 순종하리이다. 내게 이런 변화를 일으키신 당신의 은총을 내 삶을 통해 보이리이다. 주께서 나를 죽이시면 죄인을 보수하시는 당신의 공의로운 심판은 드러나지만, 주의 은총과 자비를 찬양하고 높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헨리 해먼드(Henry Hammond, D.D., 1659).
6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다윗은 담대한 사람이다. 그러한 다윗이 이처럼 낙담한 것은 정말 놀라운 변화이다. 그는 불굴의 정신과 배짱으로 골리앗을 치고, 사자와 곰을 잡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그는 흐느끼고, 탄식하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다윗의 대적이 사람들과 짐승일 때, 그는 정복자였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이 되었을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6절.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비가 이슬보다 더 낫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이슬을 내려 주시고, 참회하는 심령을 주셨다면 이것으로 족하다. 다윗처럼 눈물을 강처럼 흘려보내지 못해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눈물이 흐르는 샘이 없어도, 예레미야처럼 우리 머리를 샘으로 삼아 주야로 눈물 흘리며 울지 못해도,베드로처럼 심하게 통곡하지 못해도, 우리가 슬퍼하지 못함을 슬퍼하며 울지 못함을 운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양심의 가책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이 참회가 외식이 아니라 참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신다. 도마가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십자가의 못자국을 만졌을 때 그분은 도마를 환영하셨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그리스도의 옷깃을 만졌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도마를 환영하듯 그 여인을 환영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회개의 양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회개가 참된 것인가를 보신다.
6절. "내 침상." 그가 죄를 범했던 장소가 바로 그가 회개하는 장소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던 장소를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찔림을 받고, 거기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게 된다. 아담은 동산에서 죄를 범했고, 그리스도는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셨다. "침상에서 너 자신을 돌아보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네가 침상에 누워 악을 꾀했다면, 그곳에서 회개하고 침상을 하나님의 전으로 만들라. 죄로 더럽힌 장소마다 네 눈물로 성결케 하라. 아가서의 여인이 신랑을 찾았듯이 우리의 침상에서 그리스도를 구하자:"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아 3:1). -아치볼드 심슨.
6절.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은 눈물로 침상을 씻을 뿐 아니라 가득 적셨다. 목자장의 충성스러운 양들은 씻는 장소로 가며, 모두 쌍태를 낳으며 새끼를 낳지 못하는 양은 하나도 없다(아 4:2). 야곱의 양 떼들도 물통 곁에서 새끼를 배고서 강하고 얼룩 무늬를 한 양을 출산했다. 다윗도 길 잃은 양처럼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의 침상으로 씻는 장소를 만들고 참회의 열매를 맺었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놋으로 만들어진 큰 솥이 있었는데, 여기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씻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눈물을 모아서 물을 삼고, 그의 침상으로 솥을 만들며, 그의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삼아, 그 자신의 육체를 씻어 살아 있는 제물로 드렸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다. 히브리어로는 단순히 적시는 것이 아니라 수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거룩한 의식을 행하고 봉사한 다음에는 그의 몸을 깨끗게 하기 위해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이처럼, 다윗은 그의 침상에서 씻고 수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참회와 슬픔의 바다에서 눈물로 침상을 띄웠던 것이다. -토머스 플레이피어(Thomas Playfere, 1604).
6절.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우리의 침상을 밤마다 눈물로 적시자. 가끔 한번씩 바람을 통하게 하여 요를 깨끗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 이렇게 하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죄란 이제 금방 꺼진 냄새나는 촛불과 같다. 그것은 곧 다시 불이 붙을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상처가 되겠지만, 개가 그 상처를 핥고 온전해지듯이 곧 회복되고 말 것이다. 죄란 조금만 용납해도 금방 그 수가 늘어나는 히드라뱀의 머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룻동안 무슨 죄를 지었든지, 밤에 흘리는 눈물로 이것을 다 씻어 버리자. -토머스 애덤즈.
6, 7절. 영혼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러 모로 상처를 받고 낙담하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 그의 육체가 성하지 못하다고 했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욥 6:4). 마음의 슬픔은 사람을 나약하게 하고, 그 행하는 것을 느리고 약하게 한다. 그리고 상처받은 몸은 일반적으로 쇠퇴하고 약해진다. 그러므로 헤만은 이렇게 말했다:"내 영이 심히 곤고하니, 내가 무덤으로 가는도다." 사람의 내적 고민과 고통은 불 앞의 양초가 녹아 내리듯, 육체의 힘을 소진시킨다. 슬픔은 영혼을 어둡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아름다웠던 모든 추억을 잊어버리게 하고, 마음에 검은 구름을 드리워서 촛불을 약하게 만든다. 이처럼 곤고한 처지가 되면 사람은 그 안색이 창백해지고, 마치 강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처럼 파랗게 질리며 의기소침해진다. 그가 하는 행동은 느릿느릿하고, 기운찬 것도 명랑한 것도 없어지고 만다. 기쁜 마음은 양약처럼 좋으나, 상한 심령은 뼈를 마르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고백이 나온다:"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욥 16:16; 30:17, 19). 육체의 약함이 영혼의 고통을 낳기도 한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아무런 치료책도 없을 때에 우리 영혼도 생기를 잃어 가는 것이다. 다윗은 종종 병상에 누웠고, 분노하는 원수들을 대하기도 했다.시편에서 다윗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외적인 고통이 그로 하여금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시 6:1, 2, 5, 6).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가 되었다는 엄청난 생각에 그는 슬퍼한다. 작은 시냇물도 큰 강과 합류하게 되면 그 이름과 특성이 바뀐다. 이처럼 고통을 처음 당할 때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 길어지고 심해지며 피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회의를 품게 된다. 오랫동안 육체가 약해져 있으면 영혼이 고통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고 불안정하게 된다. -토머스 로저스(Thomas Rogers, Trouble of Mind).
7절.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두 개의 눈을 주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눈에 불을 켜고 지옥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한다.그들의 마음이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어두워진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보응하셨다. 하나님은 질병을 보내셔서 마귀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던 두 눈을 어둡게 하시고, 그들의 정욕으로 육체의 필요한 것을 채우게 하셨다.
7절.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해적들은 빈 배를 보면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배가 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들은 필히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공격할 가치를 느끼지 않고 지나쳐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그를 경외함, 그리고 이와 같은 영적인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존 트랩.
8절. "다 나를 떠나라." 이제 네 갈 길을 가도 좋다. 너는 내가 사망하는 것을 보고자 하지만, 이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시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던 그것을 은혜스럽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토머스 윌콕스.
8절.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성도들이 악한 자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은 책망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성도들이 친구들을 조심스럽지 않게 선택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공중의 새도, 들의 짐승들도 이질적인 무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새나 짐승들도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세상의 자연인과 중생한 사람, 죄와 은혜,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루이스 스터클리(Lewis Stuckley, Gospel Glass, 1667).
8절. "내 곡성." 흐느껴 울면 소리가 난다. 물결 위에서는 음악이 더 멀리, 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퍼져 나가듯이, 눈물과 함께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더 크게 울리고, 눈물이 없을 때보다 더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린다. 안티파트로스(Antipater)가 알렉산더에게 알렉산더의 어머니가 잘못한 것을 탄핵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자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 어머니의 모든 결점을 씻어 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참회하는 눈물은 물리칠 수 없는 대사이며, 은혜의 보좌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법이 없다. -스펜서, Things Old and New.
8절. "행악하는 너희." 악인들은 이렇게 불리운다. 그들은 자유롭게 죄를 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심령을 가진 자들이며, 악을 행할 때는 철저하게 행한다. 그들은 미끼를 조금씩 먹는 것이 아니라(선한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한다), 이것을 탐욕스럽게 삼켜 버린다. 그들은 온전히 죄악 가운데서 지내면서 죄를 온전히 범한다. 그들은 일을 삼고 죄를 범하기에 "행악자"라고 불린다. -조셉 캐릴.
8절.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천성이 울 줄 모르는 사람이야.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위에 가서 물을 짜 내는 것이 더 쉬울 거야"라고 한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울 줄 모른다면, 마음속으로는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는가? 지성이 있는 울음이 가장 좋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슬퍼할 수도 있다. 밖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마음 가득히 눈물이 고일 수 있다. 하나님은 겉으로 흐느껴 우는 것보다는 참회하는 마음을 더 좋아하신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있다면, 난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다:"내가······네 눈물을 보았노라"(사 38:5). 다윗의 눈물은 하나님의 귀에 음악처럼 들렸다:"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참회하는 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주와 같아서 천사들도 보기를 즐겨 한다. -토머스 왓슨.
8절.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말로 하는 소리보다도 우리의 태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눈물에서 나오는 소리를 더 잘 들으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탄식과 눈물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구절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말로 하지 못하고 흘리는 단순한 눈물이 하나님의 귀에는 더 크게 들린다고 했다. 지하에 있는 수맥의 물이 지표로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물을 보시듯이, 사람의 눈물이 얼굴 밖으로 나오기 전에 하나님은 마음속에 있는 눈물을 보신다. 사람이 슬퍼하나 눈물을 흘리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슬퍼하는 영혼 속에 흐르는 눈물의 소리를 들으신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에 있는 슬픔을 쏟아 내면 이는 하나님을 향해 창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열린 창을 통해서 마른 눈동자 저편에 젖어 있는 마음을 보신다. 잘못을 뉘우치는 자녀가 잘못을 깨달으면 말로 잘못한 것을 분명히 표현하기 전에 이미 부모가 기뻐한다. 참회하는 죄인이 처음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후에 이 죄인이 분명한 언어로 참회하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다윗은 그가 잘못한 것을 분명히 말로 표현했으며,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을 안 다윗은 이처럼 확신 가운데 감사했다:"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절). -존 던.
8절. "다 나를 떠나라." 이 구절에서 갑자가 어조가 바뀐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기도는 영혼의 거머리와도 같아서 영혼의 독을 빨아 낸다." 또 다른 사람은"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죄와 비극을 몰아낸다"고 했다. 베르나르(Bernard)는 이렇게 말했다:"기도는 절망 가운데 있는 나를 찾아와 내가 승리하고 죄 사함을 확신한 것을 보고서 떠나간다." 다윗은 이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다윗에게 모욕을 주었던 원수들에게 이 얼마나 통쾌한 말인가! 물러가라! 이리 나와라! 사라져라! 이러한 말들은 마귀나 개들에게나 하는 말이며, 도엑이나 시므이에게 적합한 말이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 심판하러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원수들에게 하실 말씀이다. -존 트랩.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시편 기자는 세 번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셨다는 확신을 표현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했던 것처럼(고후 12:8)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많이 기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셨다(마 26:39, 42, 44).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강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그로 인해 넘치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존 길(John Gill, D.D., 1697-1771).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이 구절이 원수들에 대한 저주와 악담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원수들을 치료하고 불쌍히 여기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게 어떤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언적 열정으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셨으며 앞으로도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그들에게 무거운 심판이 정녕 임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 징계를 받을 것이나 그 결과는 분명치 않다. 그분의 징계를 받고서 원수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할 것인지,아니면 더욱 완고하게 할 것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이어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 대해 "심히 떪이여"라고 했다. 그는 원수들도 자신이 당했던 것을 당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의 뼈가 떨리오니"라고 했으며, 그의 영혼에 대해서도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다윗이 이처럼'떨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원수에게 같은 것을 경험하라고 하는 것은 악의에 찬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폭풍이 분 뒤에 풍랑이 남아 있는 바다와도 같다. 큰 위험은 지나갔으나, 파도는 아직도 거칠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도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폭풍 중에서나 평안한 가운데에서도 위험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고 괴로움을 당하며 거룩한 마음으로 떤다면, 폭풍은 지나가고 하나님의 진노는 끝난 것이다. 거룩한 마음으로 떨었던 영혼은 양심의 안식을 누리고, 그 영혼이 평온함을 누리게 된다. -존 던.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시편 기자의 탄식이 나타나는 시는 이렇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성도들로 앞을 바라보고, 그의 전쟁이 끝나는 그날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도록 교훈한다. 그날이 되면 죄와 슬픔은 사라질 것이며, 의인을 대적하던 원수들에게 영원한 혼란이 갑자기 덮칠 것이다. 그날이 되면 참회하는 성도들의 베옷은 영광스러운 의복으로 바뀌고, 그가 흘리던 눈물은 방울방울 그의 관에 빛나는 보석이 될 것이다. 그날이 되면 한숨과 탄식에 이어 하늘의 노래가 천사들의 하프와 함께 울릴 것이며, 믿음의 눈은 전능하신 그분을 뵈올 것이다. -조지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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