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편
[개 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이다. 성경에서 이 시편을 제하고는 유일하게 식가욘이란 구절이 붙은 하박국 3장과 비교해 보고, 또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참조하면 “식가욘”이란 말은 ‘가변곡’을 말하는 듯하며, 이 노래에는 위로와 기쁨이 포함되어 있다. 인생을 노래하는 시편에는 가변적인 구절들로 점철되어 있다. 한 연이 승리의 찬가를 부른다면, 또 다른 연은 고통 중에 탄식을 노래한다. 여기에는 낮게 깔리는 베이스 음이 들어 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은 영국의 날씨만큼이나 가변적이다.
이 시의 머리말에서 이 노래를 지은 상황을 알 수 있다. 베냐민 사람 구시는 사울에게 다윗이 왕위를 도전하며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을 했을 것이다. 사울 왕은 이 모함을 사실로 인정했을 것이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인 사울 왕과 베냐민 사람 구시(혹은 기스) 사이에는 어떤 인척 관계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보다는 왕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왕의 신하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법이다.
이 시는 “모함받은 성도의 노래”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억울하고 불행한 상황이 시편이 나오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인생의 쓰라린 비극을 노래의 주제로 삼아 원수들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다윗은 시를 지었다. 우리도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고, 마귀를 대적하자.” 우리는 루터의 말에서 교훈을 얻어야겠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2절위험한 상황에 대한 묘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3-5절시편 기자가 자신의 무죄를 맹세함.
6-7절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것을 간구함.
8-9절보좌에 앉으신 여호와께서 모함을 받은 자의 간구를 들으심.
10-13절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을 위협하심.
14-16절다윗을 무고한 자가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저주를 부름.
17절다윗이 그의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련에서 벗어남.
이 시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너를 치려는 어떤 무기도 성공할 수 없으며, 너를 치러 일어나는 사람들을 네가 심판하리라.”
[강 해]
1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2건져 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1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반역을 꾀한다고 자신을 모함하는 자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을 탄원한다.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으로 이 시는 시작된다. 우리가 어떠한 급박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예수의 피로 맺어졌으며, 이 언약으로 내가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 다윗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도 나는 "주께," 그리고 "주께만" 피해야 한다. 나는 흔들리지만, 내게 피난처가 되신 그분, 반석이신 그분은 흔들리지 않는다.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며,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느 때든지 결코 헛되지 않다.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이제 다윗은 언약을 맺은 그분께서 힘을 주실 것을 믿고서 간절히 소망하는 바를 여호와께 아뢴다. 그를 추적하는 자들은 너무 많으며, 누구든지 잔혹한 마음으로 그를 삼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모든" 사람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을 부르짖는다. 우리의 "모든" 죄와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기 전에는 우리의 기도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를 구하소서"라는 기도는 그들의 덫에서 구출하고, 그들의 모함을 막고, 나를 해하는 시련에서 진실되고 공의롭게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다윗은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도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에 무엇을 간구해야 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나아가자. 기도하기 전에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여, 어리석은 자의 제물을 드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확실히 파악하여 더욱 열심히, 그리고 분명하게 기도로 우리의 필요를 알려 드리자.
2절. "건져 낼 자 없으면." 다윗을 위협하는 사자는 맹렬하고 잔혹하다. 다윗을 건져 낼 자가 없으면 이 원수는 다윗을 찢고 뜯을 것이다. 이 모습은 목동 생활을 했던 다윗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맹렬한 사자가 무방비 상태의 양을 덮쳐 잡게 되면, 사자는 양을 갈기갈기 찢고 모든 뼈를 부수어 먹어 치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목자가 거기 없어서 맹수로부터 양을 보호하거나 구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양의 모습은 사탄에게 던져진 사람의 모습과도 같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가 이런 위험에 처했을 때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그분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가 사자의 이빨에 찢기는 것을 볼 수 없다. 급히 일어나 사자의 입에서 자녀를 구출하실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이처럼 파멸을 당하지 않도록 구원해 내실 것이다.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원수들에 대한 두려움이 혼합되어 있다. 다윗의 원수 중에는 다른 원수들보다 강한 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위엄과 힘이 있고, 맹수처럼 맹렬하여 "사자" 같은 존재이다. 다윗은 이 원수에게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긴박하게 간구한다. 어쩌면 바울은 사울 왕을 지칭하여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우는 사자처럼 우리 주위를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원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그를 모함하는 자들에게서 이런 위험을 당했다. 다윗은 그가 당한 시련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칼로 생긴 상처는 쉽게 치료된다. 그러나 혀로 인해서 생긴 상처는 육체에 생긴 상처보다 더 깊게 파헤치고 들어가서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모함은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어도 치욕이 남는다.터무니없이 거짓 된 명성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믿는다. 사람들이 나쁜 말을 퍼뜨리면, 그것을 다시 없애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노송이 잘리우면 다시는 잎을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명예가 한번 손상되면 다시 회복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푸르름과 신선함은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선한 사람의 명성에 칼질을 하는 것은 얼마나 혐오스럽고 치사한 일인가! 그러나 악마와 같은 증오심으로 싸우는 곳에는 어떤 체면도 염치도 없는 법이다.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에덴의 정원에서 하나님이 모함을 받았다면, 이 죄인들의 땅에서도 우리를 욕하는 자들이 분명히 생길 것이다. 부활의 자녀들이여, 허리띠를 조이라. 이 불 같은 시험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5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3, 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이 시의 둘째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무죄함을 강변한다. 사람들이 모함하는 죄를 정말 지었거든, 심판을 내려도 좋다고 했다. 그가 결코 반역할 의도를 가졌던 것도 아니다. 또한 그와 화목한 친구에게 복수를 하지도 않았다.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한글 개역 성경과 RSV 역본은 이렇게 번역했으나, KJV에는 "그러나 까닭없이 내 대적이 되었던 자를 내가 구하였도다"라고 번역하여 괄호 안에 넣었다-역자 주.)* 다윗은 원수를 꼼짝없이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저 살려 보냈던 것이다. 그는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려 주었다. 한 번은 아둘람의 굴에서 살려 주었고, 또 한 번은 사울이 잠들고 그를 지키는 병사들도 모두 잠들어 있을 때에 사울의 진에서 죽일 수도 있었으나 살려 주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며 맹세할 수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의 저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저주하며 맹세한다는 것은 정말 삼가야 할 일이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맹세를 삼가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고 하셨다. 우리가 하는 말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하는 맹세도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된 성도들은 단순한 말도 다른 사람들의 맹세처럼 신실해야 한다.
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은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데비지스에 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오! 그녀는 동업자와 함께 구매하기로 한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죽어도 좋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빠져 죽었는데, 그녀는 지불해야 할 돈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5절. "셀라." 다윗은 "셀라"라고 말하며 시의 진행을 잠시 정지한다. 하나님의 법정에 항고한다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다윗은 이렇게 잠시 정지하면서 엄숙한 마음을 증가시킨다.
이 구절들을 보면서 중상과 비방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죄한 사람도 악한 자들의 중상과 비방에서 보호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사울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며, 그에게 반역한다는 모함을 받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조심해도 거짓말하는 자들이 그를 모함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듯이, 선한 것에는 질투가 따르게 마련이다. 사람이 돌팔매질을 해 대는 것도 열매가 많이 열린 나무 아래서 하는 법이다. 우리가 모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려면 천국에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은혜로운 사람을 괴롭히는 유언비어를 믿지 않도록 주의하자. 거짓말을 믿는 사람이 없다면 거짓의 시장은 한산할 것이고, 훌륭한 사람들은 안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죄인들은 성도들을 향해 악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도들을 향해 좋게 말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
6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7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이제 다윗의 맹세에 근거해서 새로운 기도가 시작된다.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지만, 그렇게 늘 기도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마음이 진실되다면, 실이 바늘을 따라가듯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6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다윗은 슬픔 가운데 재판관 되신 여호와께서 심판의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것을 보았다. 오직 믿음만이 여호와를 움직이고, 성도들을 위해 원수들에게 심판을 내리게 할 것이다.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다윗은 여호와께서 권세를 행하시고 심판주의 자리에 앉으실 것을 안절부절하며 간절히 바란다. 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그들보다 높은 곳으로 임하사 당신의 공의가 악한 자들 위에 임하게 하소서.
"나를 위하여 깨소서." 다윗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활동을 아니하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무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할 때는 지극히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결코 주무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악인이 성행하고, 성도들이 땅의 티끌처럼 압박을 받을 때는 그분께서 종종 주무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침묵은 오래 참으시는 인내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기 어려울 때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죄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즐겁게 인내해야 한다.
7절.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여호와여! 당신의 성도들은 그들의 불평을 쏟거나 당신을 크게 환영하며 당신의 재판대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KJV에는 "그들을 위하여 높은 자리에 오소서"라고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알레하"<hyl[>는 '그 위'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그를 위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는 집합적으로 "민족들의 집회"를 말한다-역자 주.) 재판관이 순회 재판을 돌 때면,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사건을 들고서 재판정으로 몰려들어 사건을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의로운 자들이 여호와께로 몰려올 것이다. 다윗은 만일 여호와께서 심판의 보좌에 오르시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도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간구하는 것이다. 주여, 내가 못나서 주께서 나를 기억하실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하여,"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을 향한 사랑을 인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소서. 당신이 은밀히 거하시는 곳에서 나오사 성문에 앉으시고 당신의 백성 가운데 공의를 실현하소서. 내가 간구하는 것이 의로운 사람들이 모두 소망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속히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택한 자를 신원하여 주시지 않겠는가?"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이제 다윗은 그의 마음의 눈으로 여호와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것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는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새롭게 소송을 올린다. 6, 7절에서,다윗은 여호와께서 일어나실 것을 간구했다. 이제 여호와께서 일어나셨다. 다윗은 주를 둘러싼 "민족들의 집회"와 함께 여호와께 나아갈 준비를 한다.
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의 재판이 이제 개시되었다는 소식을 엄숙하게 알린다. 다윗은 즉시 일어나서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외친다:"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그는 정직한 가슴에 손을 얹고 의로운 재판관을 향해 외친다. 왕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보고서, 다윗은 여호와를 둘러싼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외쳤다:"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이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이 소돔 사람들의 더럽고 추잡한 대화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메섹의 더러움과 게달의 검은 장막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9절.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KJV에는 "심장"을 "심장과 신장"으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신장이 번역되지 않았으나 히브리어로 "켈라오트"<twylk>라는 단어가 나타나며, 이는 사람의 장기로서 신장을 뜻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신장이 감정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했다-역자 주.) 이것은 진정 엄숙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깊은 곳을 다 아신다! 그분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정확하시고, 깊이 숨겨진 것까지도 감찰하신다. 그분은 "심장"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숨겨진 비밀한 생각을 아시고, 또한 "신장"을 감찰하시고 내면에 있는 애정도 다 아신다.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10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10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재판관은 박해받던 고소인의 말을 다 듣고서 죄 없는 자를 죄 없다고 선고하시고, 그를 무고히 모함하던 박해자를 큰 소리로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 판단하시는 재판정에 가까이 나아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자. 억울하게 무고를 당하던 자는 수금을 손에 들고서 공의의 여호와께 찬송을 돌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큰 소리로 노래하며 기뻐한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아! 진실되고 정직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음이 구부러진 죄인들, 그들이 아무리 계교를 부려도 마음이 정직한 자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입은 흰 옷에 묻어 있는 더러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로 이것을 씻어 버리시기 때문이다. 경건한 자에게 더러운 오물을 던졌던 자들은 이것을 보고서 뼈가 떨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원을 들어 주시는 날, 그날은 우리에게 해가 뜨는 날이고, 죄인들에게는 영원히 해가 지는 날이다. 진실은 기름과 같아서 항상 물 위에 뜨는 법이다. 우리의 원수들이 모든 힘을 다한다 해도 그것을 물 속에 빠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팔 소리에 죽은 자들이 깨어나는 날, 우리는 그들의 모함을 이겨 낼 것이다. 그날이 되면 거짓말을 일삼던 입술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우리는 영광 가운데 빛날 것이다. 오, 성도들이여! 원수들이 네게 행하는 그 모든 행위와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무는 어떤 바람도 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그분은 원수들의 입술로 당신이 저주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생명책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울 수도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에 그들에게 보수하실 것이다.
11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분은 죄를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죄에 탐닉하는 자에게 분노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감정이 없고 무감각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너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참회하지 않는 죄인들아!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매일 매일 너희들을 향해 분노하신다. 죄인에게는 가장 좋은 날이라 해도,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는 날이다. 죄인들에게 축제의 날이 계속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안전한 날은 하루도 없다. 태초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뜨겁게 달구어지지 않은 때는 한 시간도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은 악한 자를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악인이 불살라지는 날에 그들은 그루터기만 남게 될 것이다.
12, 13절.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하나님의 길고 높이 들린 손으로 후려치는 심판을 견딜 자 누가 있겠는가! 우리가 매일 행하는 악은 악의 숫돌을 돌리고, 하나님은 그 위에 칼을 갈고 계신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칼은 우리를 속히 조각 조각 자를 것이다. 죄인은 회개하느냐, 아니면 불에 타느냐, 두 가지 중 선택해야 한다. 다른 선택은 없다.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지금도 그 화살은 목말라 한다. 그래서 박해자의 피로 목을 적시고자 한다. 활은 당기어졌다. 목표물은 정해졌다. 오, 죄인들아! 이제라도 화살이 활을 떠나 네게 날아온다면! 하나님의 화살은 결코 목표물을 비켜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화살은 "죽이는 기계"라는 것도 기억하라. 심판이 더딘 것 같으나, 결코 지체하지 않는다. 헬라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 그러나 그 맷돌은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14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15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이 세 절의 묘사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자들의 역사를 볼 수 있다.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이 첫번째 비유에 나타난다. 악인의 배는 죄악으로 가득 찼다. 이제 죄악을 더 이상 배에 담고 다닐 수가 없어서 그것을 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는 해산의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악한 의도를 행한다.
"잔해를 잉태하여." 이것은 그가 맨 처음 했던 추한 행동이다. 그는 마귀와 교제했고, 악의 세균에 감염되었다. 이처럼 불경건한 수태로 생긴 자손을 보라. 자식은 아비를 닮았다. 그 아비의 이름이 "거짓의 아비"였더니, 그 자식은 과연 아비를 존중했다. 악인이 낳은 자식은 '거짓'이었던 것이다:"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첫번째 비유는 이렇게 결론이 났다.
15절.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그는 교활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서 땅을 파는 더럽고 힘든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에 흙이 묻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빠지기만 한다면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악한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 마치 맹수나 되는 것처럼 사냥을 나섰다. 아니, 이것도 아니다. 그들은 토끼나 여우를 사냥할 때 쫓아다니는 것처럼, 경건한 자들을 쫓아다니지 않았다. 이런 방법으로는 경건한 자를 따라 잡는다거나 화살을 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몰래 덫을 놓고서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우리 원수들은 우리를 대면하여 보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를 멸시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장면을 보자.
15, 16절.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아! 이것이 그의 마지막 운명인 것을! 그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우리는 이것을 보고서 웃지 않을 수 없다. 보라! 바로 그 자신이 야수와도 같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사냥한 것이다. 그가 무엇인가 쫓아 다니더니, 정말 합당한 것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 하 하 하!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모두 이곳에 와서 덫에 걸린 사냥꾼을 보라.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을 물어뜯으려 하더니 자기 자신을 물어뜯었구나.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이런 자비는 쓸데없는 낭비다. 자신을 제물로 삼아 값을 치렀으니, 이것은 공의롭고 당연한 일이다. 그의 입으로 악을 내뱉더니, 그 자신의 가슴에 떨어졌구나. 이웃집에 불을 놓으려고 횃불을 들고 다니더니, 자기 집을 불태웠구나. 불길한 새를 내보냈더니, 자기 집으로 돌아왔구나. 그가 높이 들었던 매로 자신의 등을 후려쳤구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더니, "자기 머리로 돌아왔구나." 돌멩이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내던졌더니, 그것이 "자기 정수리에 내렸구나." 저주는 병아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 병아리들은 결국 집에 돌아와 알을 낳는다. 재는 그것을 뿌리는 사람의 얼굴로 돌아오는 법이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시 109:17). 고대의 역사나, 현대사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이웃에게 누명을 씌우려던 자들은 결국 자기 손에 불을 질러 대는 것이다. 이런 일이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결국에는 일어나고 말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나봇의 포도원에 개를 보내셔서 아합의 피를 마시게 하지 않으셨던가. 조만간에 박해자들의 악한 행위는 결국 그들의 품으로 뛰어들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은 마지막 날에도 일어날 것이다. 사탄이 쏘았던 그 모든 불화살들은 사탄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고,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들이 뿌렸던 씨앗을 추수하게 될 것이다.
17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절. 우리는 이 시편의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에는 이 시의 서두와는 대조적으로 즐거움이 나타난다. 모든 시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시편은 의인이 복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악인의 비극과 대조되어 더욱 빛이 난다. 빛나는 보석은 검은 박편을 배경으로 반사될 때에 더욱 반짝이는 것이다.
찬양은 경건한 자가 하는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영원히 행할 일이며, 현재 누리는 기쁨이다. 찬양에는 노래가 따른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모함을 받던 자가 이제는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되었다. 그는 잠시 동안 수금을 현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름다운 곡조로 노래하며, 삼층천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보내는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식가욘." "식가욘"은 이 시가 나타내고 있는 세상의 도덕적인 측면을 말하는 단어라고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시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 단어는 문체의 불규칙함과 다른 시편에 나타나 있는 평온이 없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에발트는 이 시를 "혼란스러운 서정시"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불규칙한 문체, 그리고 의미가 무질서하게 전개되는 것이 하박국 3장과 비슷하다. 이 시와 하박국 3:1에만 "식가욘"이란 단어가 나타난다. -앤드류 보나.
시 7편 전체. 이 시의 직접적인 기록 배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시의 진정한 주제는 메시아가 그를 무고히 모함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을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과,모든 인류의 최종적인 회심, 미래에 있을 심판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명백하다. -사무엘 호슬리(Samuel Horsley, LL.D., 1733-1806).
1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시편에서 다윗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호와"와 "내 하나님"을 합하여 함께 부르는 첫번째 예이다.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린다면, 서두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다. 하나님의 이런 이름들은 다윗의 신뢰와 믿음의 기초가 된다. "이 이름들은 최상의 경외심과 가장 소중한 믿음을 나타내 준다. 또한 하나님께서 흠이 없이 온전하시고, 그분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은혜로운 관계를 맺으셨음을 뜻한다." -윌리엄 플러머.
2절.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호랑이들은 향기로운 음식 냄새를 맡으면 분노하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악한 사람들은 경건한 모습을 보면 분노한다. 어떤 야만적인 나라에서는 태양이 뜨겁게 내리쬘 때면 태양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글을 읽었다. 이와 같이 악한 자들도 경건한 자들의 빛과 열정을 향해 화살을 쏜다. 경건한 자와 악인 사이에는 자연스런 증오심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예레미야 버로즈(Jeremiah Burroughs, 1660).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고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의 욕을 많이 받았다. 터툴리안은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을 빗대어 욕을 하는 기발한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 예를 들면, 그들은 티에스테스에게 저녁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그는 자기 형제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했고, 이때에 자기 살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고 했다. 그들은 또한 크리스천들이 밤에 만나서(사실 그들은 낮에 만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촛불을 끄고 함께 지내면서 지저분한 짓을 저지른다고 악담을 했다. 또한 그들은 모두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터툴리안 시대에 이방인들은 크리스천들의 하나님을 손에는 책을 들었으나 머리는 나귀의 머리를 한 괴물로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에 대해 학식이 있는 체하나 사실 배운 것이 없는 바보들이고,촌스럽고 무식한 자들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쥬얼(Jewel) 감독은 누가복음 11:5에 대해 설교할 때 터툴리안의 이 글을 인용하며 그의 시대에도 이와 같다고 했다:"오늘날에도 우리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며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가?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 보라:'크리스천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구두 수선장이, 양복장이, 베 짜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이라고는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자들이 아닌가?'" 그는 터툴리안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크리스천들을 제국의 원수로 취급한다고 주장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아볼리나리스(Apollinaris)에 대해 언급했다. 아볼리나리스는 유대인과 크리스천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은 어떤 야만인들보다도 바보라고 했다. 파울루스 파기우스(Paulus Fagius)는 애굽인들이 크리스천들을 대했던 이야기를 전했다:"그들은 가장 지저분하고 음란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악담을 했다:"그들은 병에 걸린 자들이다. 제7일이 되면 이 병 때문에 쉬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원수들의 비방을 받을 준비부터 해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비방했다:"네가 엘리야냐? 예레미야냐?"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사타나시우스"(Sathanasius)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아리안 교도들을 대적하는 특별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키프리안(Cyprian)을 "코프리안"(Coprian)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똥을 치우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키프리안이 했던 그 모든 훌륭한 일들을 그저 똥이나 모으는 사람으로 비하했던 것이다. -예레미야 버로즈.
3절.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당신은 당신의 이름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좋은 이름은 향기로운 기름과 같다(아1:3). 이와 마찬가지로 악한 이름은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욕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들어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만 깨끗하면 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의 무죄가 당신에게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당신이 깨끗하다는 것을 하나님에게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아 당신의 선한 이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모함을 하고 거짓을 말할 때에 분노를 보여서는 안 된다. -토머스 구지(Thomas Gouge, 1660).
3절. 악한 세상이 당신을 핍박한다면, 이는 당신 안에 선한 것이 있다는 증거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무엇을 행했기에 이 악한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가?"라고 했다. 악인의 칭찬은 어떤 악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들이 비난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한 것이 있다는 증거이다. -토머스 왓슨.
3절.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다윗은 죄악이 손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손으로 죄를 범하지만, 항상 손으로 행하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탈취해 가고, 손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 행사를 못하게 한다. 다윗도 이렇게 말했다:"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대상 12:17). 그는 아무것도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셉 캐릴.
3, 4절. 선한 양심은 확신이 흘러 넘치는 샘과도 같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선한 양심에는 든든한 확신이 따른다. 이것을 가진 자는 소동과 난리가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노아처럼 신실함과 평안함, 의로움과 담대함을 갖는다. 제자가 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 금하셨던 한 사람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따르오리다"라고 했던 것처럼, 선한 양심은 믿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내가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강건케 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붙들어 줄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위로가 될 것이며, 당신이 죽을 때에도 친구가 될 것입니다. 모두 당신을 떠난다 해도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토머스 브룩스.
4절. "그러나 까닭없이 내 대적이 되었던 자를 내가 구하였도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살려 준 것을 말한다. 첫번째는 엔게디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그가 들에서 잠을 잘 때 살려 주었다. -존 길.
4절.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선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다. 이것은 은혜의 특성이기도 하다. -윌리엄 세커.
4절. "그러나 까닭없이 내 대적이 되었던 자를 내가 구하였도다." 사람이 악에게 진다는 것은 그가 약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을 이길 때는, 은혜가 승리하는 것이고, 고귀하고 용감한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쪽에 수치와 정복을 당하게 하신다.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을 때에도 그의 옷자락을 조금만 베었을 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사울의 마음이 녹았으며 다윗을 향해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라고 했다. 사울이 다윗을 향해 악의를 품고 그를 추적했지만, 다윗은 원수를 갚을 수 있을 때에도 원수를 갚지 않았고, 이때 사울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토머스 맨턴.
5절.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이 표현은 전투에서 피정복자가 말발굽에 채이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에서 따온 표현이다. 다윗이 말하는 바는 만일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의 원수들이 그를 정복하고, 그가 이 모든 수치와 조롱을 당해도 좋다는 것이다. -알버트 반스.
5절.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아킬레스가 헥토르의 몸을 땅에 끌고 트로이의 성벽을 돌 때, 그는 야만적인 시대의 관례를 따라 행한 것뿐이다. 다윗은 자신의 양심상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므로 검은 베냐민 족속의 말이 사실일진대 자기에게 이런 저주가 임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호된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도전하는 것은 그에게 강인하고 아름다운 성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C. H. S.
6절.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명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욕심내면서 간구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올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여호와여, 나는 개인의 야망이나 어리석은 정욕이나 타락한 욕망으로 나 자신의 육체를 즐겁게 하고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에서 나오는 분명한 인도를 따르며, 이 말씀을 굳건히 부여잡나이다." -존 칼빈.
7절. "민족들의 집회." 이 구절은 다음의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많은 사람들로서, 이들은 나를 잔혹하게 압제하는 자들을 막으시고 나의 의로움을 변호하시는 여호와의 공의와 거룩함과 선하심을 목도할 자들이다. (2)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며,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를 두르게 하시고." 당신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왕으로서 나는 그들이 각자 거하는 곳에서 나와서 함께 모여 당신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겠나이다. 사울의 시대에 그들은 이 일을 게을리 했고, 사울 왕도 이것을 묵인했으나 나는 당신께서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인하여, 그리고 내가 왕이 되어 통치하는 동안 백성들이 받을 그 많은 축복을 인하여 그들과 내가 함께 당신을 찬양하며 제물을 드리겠나이다.
"그들을 위하여." 백성들은 압제를 당하고, 공의롭게 판단을 받지 못하였고, 그리고 당신을 경배하는 특권도 누리지 못하고 있나이다. 그들을 위하여 구원하소서.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당신의 높은 자리, 당신의 재판석에 오사 그곳에 앉으시고 나를 위해 판단하소서. 이 구절은 사람들의 재판정을 염두에 두고서 한 표현이다. 사람들의 재판정은 일반적으로 사람들 위에 있는 높은 곳에 세워졌다(왕상 10:19). -매튜 풀(Matthew Poole, 1624-1679).
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성도들이여! 마지막 심판의 날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심판주를 가볍게 생각했던 자들, 그를 지속적으로 대적하고 그분의 거룩한 길을 멸시했던 자들이 두려워할 일이다. 그날이 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즐거워하며 머리를 들라. 마지막 날은 그대들에게 최고의 날이 될 것이다. 심판주는 그대의 머리시며 남편이시고, 구속주이시며 그대를 변호하는 분이시다. 그대들은 심판대 앞으로 나아오겠지만,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오심은 그대들을 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무시했던 구세주는 마침내 엄한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 1676-1732).
9절.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KJV에는 "심장"이 "심장과 신장"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우리들의 공통적인 체험에 의하면 우리 마음에 있는 즐거움, 슬픔, 두려움은 신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참조. 잠 23:16; 시 73:21). 사람들은 신장이 우리 몸 깊숙이 숨겨져 있고, 기름에 싸여 있으면서 우리 영혼의 비밀스런 활동과 애정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신장을 감찰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우리의 숨겨진 비밀스런 생각이나 영혼의 소망을 시험해 보고 아신다는 말이다. -존 파크허스트(John Parkhurst, 1762).
9절.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나는 전능한 여호와라
나만이 네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을
감찰할 수 있나니
뱃사람의 낚시추는 땅에 닿아도
네 마음속 깊은 곳은 알지 못한다.
-프란시스 퀄스(Francis Quarles, 1592-1644).
9절. "심장." (KJV에는 "심장과 신장"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심장은 사람의 사고력을, 그리고 신장은 애정을 상징한다. -헨리 에인즈워스.
10절. "나의 방패는······하나님께 있도다." 이 말은 "나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무기 드는 자가 곁에 있다가 전사에게 필요한 무기를 주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앤드류 보나.
11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학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논쟁을 많이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하나님은 의인을 심판하시며,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것이 정말 잘 해석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남는다. 이러한 해석과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또 이것을 지지하는 증거 자료도 있다. 에인즈워스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분노하시며 매일 위협하신다." 이와 비슷한 번역이 커버데일 성경(Coverdale's Bible)에 나타난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하나님은 항상 위협하신다." 1549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성경(King Edward's Bible)에도 이와 같은 번역이 나타난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이와는 정반대로 해석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호슬리 감독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그러나 그는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 그는 대부분의 고대 번역본을 따르는 듯하다. 불가타 역본에는 "하나님은 의롭고 강하고 인내하시는 재판장이시다. 그분께서 매일 분노하시겠느냐?"라고 번역되었다. 70인역에서는 또 이렇게 번역되었다:"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강하고, 오래 참으시는 재판관이시다. 그분은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 시리아 역본에는 "하나님은 의의 재판장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라고 번역되었다. 클라크 박사도 이에 동조하며, 본문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맨 처음 훼손되기 시작했다고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이 학자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회복하여 읽었다. 히브리어로 "엘"(lae)과 "알"(la')은 모음만 다를 뿐 자음은 같다. "엘"은 '하나님'을, 그리고 "알"은 '아니다'라는 부정의 뜻을 갖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원문에는 한 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두 번 나타나지 않으며, 이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간단히 번역할 수 있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이시며,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 이 구절은 불가타 역본이나 70인역, 다른 고대의 역본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분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죄인을 향한 분노에는 무한한 인내가 담겨 있다. 그분이 매일 진노를 보이시는 것은 아니다. -존 모리슨(An Exposition of the Book of Psalms, 1829).
11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원문의 표현은 지극히 강하다. 이 강조를 그대로 살린다면 분노로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맨트(Richard Mant, D.D., 1824).
11, 12절.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와 위엄에 도전하는 반역자의 무리들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세워 두셨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불과 칼로써 이 땅을 정복하신다. 죄인들에 대한 심판은 하늘로서 좇아 나며, 매일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 의로우신 발로 악한 죄인을 밟으셔서 죽음에 이르게 하신다.죄가 들어오는 가정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의 각 기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영혼과 몸의 각 부분은 혀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그러므로 심판도 철저하게 임한다. 우리는 안과 밖으로, 우리의 영혼과 몸에 심판과 저주가 빼곡이 적혀 있어서, 또 다른 심판을 추가로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윌리엄 거놀.
11절-13절.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힘이 있어서 이와 같이 죄인을 심판하게 한다. 루터는 이 구절에 대해 훌륭한 글을 썼다. 시편 기자는 분노하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했는데, 이렇게 한 주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또한 자신의 내적 경험을 묘사하며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시편 기자와 선지자에 대한 구분을 간과했다:"선지자는 야비한 인생들과 비교하여 교훈을 주었는데, 이는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무지하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에게 야비한 인생들의 일로 비교하여 말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경각심을 품게 될 것이다. 이제 선지자는 칼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 활을 덧붙였다. 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목표물을 정하고 활을 당기고 화살을 쏠 준비가 되었음을 말한다. 불경건한 자들은 목이 곧고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여, 그들에게 어떤 위협과 경고를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심판을 받기 전에는 그 심판이 어떠할 것인가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경건한 자들에게 임박했다는 것을 강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다른 시편에서는 죄인들에게 이와 같이 무서운 위협과 진노가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도 언급해 둔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이처럼 많은 말로 그들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선지자는 죄인들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자신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인지를 말해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참소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불의하게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헹스텐버그(E. W. Hengstenberg, 1845).
12절.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악인과 다투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지극히 적다. 우리가 믿었더라면, 무너져 내리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떨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빌 2:15)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악한 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이처럼 우리에게 간곡히 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활을 당기셨고, 화살은 시위를 떠날 준비가 되었다. 그들을 파멸시킬 도구도 모두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 쏜 화살이 우리 귓가를 지나가는데 우리가 악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다. "떠나가라! 고라와 도단과 아비람의 장막에서 떠나라! 그들의 죄와 함께 너희가 파멸을 당할까 하노라!" 좋은 무화과가 나쁜 열매와 한 그릇에 있으면 모두 섞는 것이 아닌가! 순금이 찌꺼기와 함께 있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닌가? 롯은 소돔 사람들과 함께 거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 내지 않으셨다면 그는 소돔 사람들과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당신은 악한 자들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적적으로 구해 주시기를 바라는가? 하나님께서 강도들의 무리를 향해 그들의 등 뒤에서 복수의 소리를 외칠 때에 그들과 함께 길을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안전을 도모하고 싶으면 짐승들의 세상에서 교훈을 받으라. 사슴은 맹수들에게 쫓기다가 다친 사슴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무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친 사슴을 무리 중에서 밀어낸다. -루이스 스터클리.
12절.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칼을 가는 목적은 더 깊이 상처를 내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칼을 가시는 것은 잘라 내기 위한 것이다. 그분이 활을 당기시는 것은 죽이기 위한 것이다. 그 과녁이 되어 있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윌리엄 세커.
13절.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하나님은 그를 대적하는 자에게 화전을 쏘신다. 이 말에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증오가 나타나 있다. 그분은 화살을 아무 곳에나 쏘지 않으시고, 악인을 정조준하여 쏘신다. 일리리쿠스(Illiricus)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준다. 로마 황제 찰스 5세의 장군 중에 펠릭스(Felix)가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가 죽기 전에 루터교도들의 피를 박차에 묻히며 말을 달릴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는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조준하여 화전을 쏘셨다. 바로 그날 밤,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셨다. 그는 목이 매였고, 자신의 피에 숨이 막혀서 죽었다. 그가 말을 타지 못했으나 목욕을 했고, 루터교도들의 피로 박차를 묻힌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 목까지 묻혀 죽었다. -예레미야 버로즈.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여기 나오는 단어들은 다윗을 향한 음모의 잉태와 출산과 유산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의 원수들은 무엇을 했는가? (2)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구절에서 원수들의 의도와 우리의 의무를 살펴볼 수 있다. 원수들은 죄악을 해산하고 잔해를 잉태했다. 그들이 죄를 잉태할 때에 누구에게서 강요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이는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리처드 십스.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잉태한다는 것은 해산하는 것보다 먼저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해산이 먼저 나타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인은 그가 의도하는 악에 사로잡혀서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행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악을 즉시 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거짓을 출산한다. 그들은 스스로 성공을 약속했으나 악한 결과가 나타나 스스로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악인들은 의인을 대적하려 하나,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이 계획했던 것들은 모두 유산되고 만 것이다. -존 메이어(John Mayer).
14절. "궤휼을 낳았도다." 모든 죄는 거짓이다. -어거스틴.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세상 사람들의 환대는 야엘의 환대와 같도다
왼손에는 우유가, 그러나 오른손에는 말뚝이 들렸네.
-토머스 풀러.
14, 15절.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그들이 만든 함정은 지옥처럼 깊고 낮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만든 함정에 빠진다.
함정을 파 만드는 자가 그 함정에 빠지는 것보다
더 공정한 법은 세상에는 없다네.
악인들은 죄의 홍수 가운데서 살았지만, 이제 그들이 갈 구덩이는 물이 없는 곳이다. 그토록 많은 술을 소모했던 다이비즈(Dives)가 이제는 물도 구할 수 없다(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이름을 다이비즈로 불렀다-역자 주). 한 주전자의 물도, 한 방울의 물로도 그의 혀를 시원케 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그는 나사로에게 빵 한 조각도 주지 않더니, 이제 한 방울의 물도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극히 적은 한 조각을 아끼더니, 이제 한 방울의 물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살아 있던 나사로에게 어떤 적선도 하지 않더니, 이제 나사로는 그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죄에 탐닉하는 자는 죄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15절.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웅덩이를 만드는 것은 고대에 맹수를 잡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 적군을 잡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 구절은 어떤 사람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빠지게 하려고 구덩이를 만들고, 위험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위장을 했으나, 마침내 부주의하여 자신이 함정에 빠지고 자신이 쳤던 덫에 걸리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Pictorial Bible.
16절.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주석을 재미있게 잘 쓰는 트랩 선생은 이 구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것은 스토리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영국의 감옥을 탈출하여 안트워프로 도망갔다. 이제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그는 알바 공작의 명을 받아 그곳으로 오는 모든 배에서 영국 서적을 색출해 내는 일을 했다. 한 영국 상인이 안트워프로 무역을 하러 왔다가 이 나쁜 새를 잡기 위해 덫을 놓았다. 그는 자신의 배에 이단 서적과 또 다른 책들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스토리 박사에게 비밀리에 들어가게 했다. 스토리 박사는 이 모든 소문이 사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서 그 배로 쫓아갔다. 그는 배를 샅샅이 조사했다. 배의 한 쪽에서 무엇인가 수상한 것을 발견하고서 밑으로 내려가 조사하기 위해 뚜껑을 열게 했다. 선원들은 주저하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뚜껑을 열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나타났다. 스토리 박사는 이것을 보고서 그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다시 나올 수가 없었다. 뚜껑이 닫히고, 배의 돛이 올려지고, 영국을 향한 바람을 맞으며 즐거운 항해가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배는 영국에 도착했고, 그는 붙잡혀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마침내 사형을 당했다. 그에게 마땅히 임한 심판이었다."
16절. 팔라리스(Phalaris)는 다른 사람을 고문하기 위해 황소를 사용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이 고안한 것으로 고문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이방 세계에서도 유명하다······대주교였던 크랜머(Cranmer)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손을 불에 넣고서 태웠다. 그는 교황에게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면서 "아! 내 오른팔은 쓸모가 없어!"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이 일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Divine Judgments by Way of Retaliation, 1697).
17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는 더욱 많은 자비를 받는다. 불행한 일을 당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불행을 면하게 된다. 좋은 일로 감사하면, 이 좋은 일은 더욱 오래 간다. 어려움을 당해서 잠잠히 인내하면, 이 어려움은 즉시 사라진다. -윌리엄 다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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