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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공간**/스펄전 묵상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 스펄전 묵상

by With Lord 2016. 1. 20.

1월20일

아침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 창세기 4:2


  목자였던 아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신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초기의 제사 모습은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하게 진리를 전달합니다. 아침에 동녘을 물들이는 서광처럼 그것은 모든 것을 게시하지는 않지만 태양이 떠오르고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커다란 징조입니다. 목자이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희생제물을 드린 아벨에게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여호와가 항상 열납하시는 희생제물을 아버지 앞에 드리시는 우리 주님을 발견합니다. 아벨은 그의 형애개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랬습니다. 자연적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은혜의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는 사람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그가 피를 흘릴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죽임을 당해 그의 제단에 피를 뿌렸고, 그의 피와 함께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주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는 동안 사람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사실이담겨져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우리는 인간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그 자신의 피로 제단 뿔을 적시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분에 대해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아벨의 피가 호소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예수의 피는 강력한 혀를 갖고 있고, 그 외치는 부르짖음의 의미는 복수의 소리가 아니라 은헤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목자의 제단에 서서 죽임당한 제사장으로서 피 흘리시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서, 우리의 양심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람들에게서, 영원무궁토록 평화를 외치는 그분의 피의 외침소리를 듣는 것은 말하 수 없이 귀하고 보배로운 일입니다. 아벨은 시간상 첫 번째 목자였지만,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 능력으로 첫 번째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위대하신 양의목자여, 당신의 목장의 양들인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보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찬송합니다.


저녁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가게 하소서 - 시편 119:37


  허탄한 것은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바보의 모자와 벌어진 입, 세속인의 환락, 방탕꾼의 춤과 수금 그리고 술잔 등, 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은 허탄한 것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염려와 제물의 속이는 속성 등과 같은 것들도 똑같이 허탄한 것으로서, 사실은 휠씬 더 위험합니다. 사람은 극장에서처럼 직장에서도 허탄한 것을 따를 수 있습니다. 만일 그저 돈 모으는데 평생을 보낸다면, 그는 시간들을 허탄한 일에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인생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허탄한 사람들과 표면적으로만 다를 뿐, 실제로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때는 확실히 본문 중 첫 번째 부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그 다음 해야 할 기도는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거의 죽은 것 같이 어리석고, 우둔하고, 미련하다고 고백합니다. 성도여, 당신도 똑같다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어리석어서 아무리 좋은 동기를 갖고 있다고 해도, 주님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우리를 살아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면, 지옥이라도 나를 살아나게 하지 않겠습니까? 죄인들이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면서 깨어있지 않겠습니까? 천국이 나를 살아나게 하지 않겠습니까? 의인들이 상급을 생각하면서 침착해지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나를 살아나게 하지 않겠습니까? 죽음과 하나님 앞에 서는 심판을 생각하면서 어찌 주님의 사역에 게으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은헤로운 상처를 생각하면서, 그분의 십자가 앞에 앉아 있으면서, 열심과 열정으로 도전받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구말고요! 단순한 성찰로 우리의 열심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여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하고 부르짖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열렬한 간구로 시편 기자의 전 영혼을 살아나게 됩니다. "내 눈을 돌이키소서"라고 육체는 간구합니다.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영혼은 외칩니다. 이것은 매일 드려져야 할 바른 기도입니다. 오 주여, 오늘 저녁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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