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그리스도인과 못난 그리스도인의 차이(천국 상향지원과 하향지원)
히 12:4-11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상향지원’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상향지원이란 수험생이 대학교에 진학할 때
자신의 현재 성적보다 더 높은 점수로 지원해야 합격할 수 있어 보이는 곳에
무리해서라도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향지원을 했을 때 지원자가 적어서 정원 미달이 될 경우
지나치게 낮은 점수만 아니라면 합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연히 합격할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향지원’은 자신의 성적으로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곳에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수/삼수도 각오하여 반드시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수험생들은
하향지원을 생각하지 않겠지만
재수를 원하지 않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상향지원과 하향지원을 적절히 섞어
안정적으로 입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도 상향지원과 하향지원이 있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이 정도는 죄가 아니겠지...’ 하며 긴장감 없는 신앙생활로
죄를 범한 뒤 회개하는 모습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신앙생활을 오래했고 주일성수를 하고 하나님께 예물도 올리고 있으니 당연히 구원에 이르겠지’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천국에 상향지원을 하는 사람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합격자 발표가 나는 그 날, 울면서 땅을 치는 사람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마음 지키기에 힘쓰며, 행위에도 철저히 주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애쓰는 사람들은
하향지원을 하는 사람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 합격자 발표가 나는 그 날, 환하게 웃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시게 해드리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존재이유이자 인생의 가장 큰 목표이기에
대학 입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합니다.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 결정되는 것에
‘대충’, ‘적당히’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교인들을 상대로 상담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인식도 많이 바뀌었으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마도 죄라고 여기실 것 같진 않을 것 같으니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일단 부딪혀 보시죠.“
이런 식으로 느슨하게 가르치거나 또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여 행동했지만
그것이 분명히 성경말씀에 죄로 규정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부분이면 그 사람들은 당연히 지옥에 가게 됩니다.
누가 시켰든, 스스로 결정했든 그 선택으로 인하여 지옥에 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누구도 책임져 줄 수가 없고 오직 당사자가 감당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가 바로 ‘극단적 상향지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매우 철저하게 매일 스스로의 모습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고 있는
‘하향지원’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향지원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이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마 11:30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분이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 중에는
신앙의 완벽을 추구하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철저히 통제하는 신앙생활을 이어가다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더욱 엄격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많은 제한을 두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낙오하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피곤함과 극단적인 염증을 느끼는가 하면
마치 결벽증을 가진 사람처럼 스스로를 얽매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지나친 열등감을 갖고 영적으로 침체되기도 합니다.
‘나는 믿음 좋아 보이는 저 사람들보다 믿음이 연약하고,
과거에 죄도 많이 지었으니까 나는 안 될 거야. 나는 열등해.
나는 여전히 마음이 선하지도 않고, 죄를 계속 범하니까 나는 구제불능이야.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이젠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미 버림받았는지도 몰라.
나는 쓸모없는 쓰레기구나. 아무 것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생각을 하면서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많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신앙생활은 사실
행복하고, 즐겁고, 쉽고, 가벼운 것인데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극단적 하향지원을 하고,
오늘날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영적인 부분에서도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다보니 많이 지쳐버린 것입니다.
먼저 우리들은 이 한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조금 더 성장한 사람과 아직은 덜 성숙한 사람 간에
약간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미한 수준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피조물들입니다.
마 18:12-14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눅 19:10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신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주신 이유는
거룩한 자들을 골라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다.
거룩하게 보이는 사람도, 거룩한 척을 하며 사는 사람도, 장성하여 실제로 거룩한 사람까지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전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죄인이었습니다.
롬 3:10-28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많은 사람들은 의인과 죄인을 마치 물과 기름처럼 구분하여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사람은 의인과 죄인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용서 받은 죄인’, ‘아직은 용서 받지 않은 죄인’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다 부끄럽고, 부족하고,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선 ‘도토리 키 재기’,
오십보백보 아니, ‘5보6보’와 같습니다.
교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자신은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는다며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거나,
자신은 은사가 있기에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하여
우월하다는 주장을 은근히 강조하는 사역자들, 은사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은밀히 숨기고 있는 여러 종류의 죄와 일탈들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의롭다 여기면서 스스로를 높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보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게 되어
정말로 자신이 진실로 특별하며 거룩하다고 믿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제가 없는 얘기를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역자들을 사방으로 찾아다니며, 의지하고 섬기면서
마치 자신들도 특별한 그리스도인이 된 기분을 느끼려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분 속에서 ‘나는 이 사람과 같은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안전하게 구원에 이르겠지?’ 하며 안심합니다.
또한 그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에 열등함을 느끼고 좌절하며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치 무당을 찾아가듯
자신에게 신탁을 받아줄 선지자(?)를 찾고,(예수무당)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를 궁금해 하며 질문들을 합니다.
‘생활예언’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긴 것은 이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심리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혼란스럽고 죄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는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내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영적 문제는 무엇인지’,
‘왜 나는 지금도 이런 모습인지’, ‘왜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내 인생은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것인지‘ 등등 고민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고민이 많은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섬겨야 한다는 것.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다른 것에서 해결 방법을 찾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1:1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
이 중요한 것을 먼저 알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는 자들,
그리고 마치 경쟁을 하듯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는 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정말로 마음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
남들이 어떻든 관계없이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늘 하나님을 찾고자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인생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요 20:29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내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뭔가가 느껴지는 것이 없어도
사람을 의지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고,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싸움을,
영적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의지했던 지난날들과
열등의식을 가진 채 절망 가운데 시간을 낭비했던 것이
아깝고,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어느 때이든지 우리의 친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을 정말로 의지하십시다.
모두가 죄인이고 의인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과
아직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 자들뿐입니다.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부끄러운 피조물들입니다.
빌 2:12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람은 누구나 언제라도 마음이 높아져서 교만해질 수 있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며 타협할 수 있고,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점검하며,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매일 각성하여 살얼음판을 걷듯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은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설교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큰 영적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설교입니다.”
이런 종류의 칭찬을 들으면 마치 그 설교가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양,
마치 자신이 대단하여 그런 설교를 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높아져 교만해집니다.
실제로 설교를 하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교만에 빠진 채 헤어 나오지 못하여 점점 더 교만해지고
자신이 오히려 겸손하다고 착각하며 거룩함을 흉내 냅니다.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행히도 깨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줄 아는 설교자들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더러워진 모습에 슬픔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철저히 회개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이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설교는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며, 돈벌이의 수단도 아니며,
설교자는 그저 빨대와 같은 통로로서
중간에서 전달만 잘 하면 되는 하나님의 ‘노예’(종)일뿐입니다.
이 사실을 끝까지 잊지 않으며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순종만 하는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설교를 접하는 분들에게 중보기도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목회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목회자에게 잘해야 복을 받는다며 은근히 사람을 숭배하도록 유도하는 목회자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함께 섬기자는 목회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굽실거리며 담임목사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분위기가 가득한 교회에서
같이 휩쓸려 우상숭배를 하지 마시고,
‘목사들은 나와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잘못된 생각도 버리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잔뜩 받고 있는 자녀답게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당당히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가 서는 날, 지구에 존재 했던 모든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이었고, 누가 가짜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밝혀지게 됩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큰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수많은 사역자들을 폄훼하여 비판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사역자들도 다 죄인이었으며,
은혜로 사함을 거저 얻은 죄인으로서 잘난 척 할 것이 단 하나도 없고,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 아래서 모든 사람이 겸손할 수밖에 없기에
멀리서 보면 거룩해 보일 수도 있는 주변의 사역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고
자괴감 속에 좌절하지 마시라는 의미로 이러한 사실에 관해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나는 구제불능이야. 포기할래.’ 하는
못된 생각을 가졌던 분이 계시다면
마귀가 좋아할 이런 생각은 하루 빨리 멀리 내던지시고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앞에 속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 중에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목사도,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는 사역자들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가장 중요한 순간,
혹은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쉽게 버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우리를 가장 사랑해주시며,
지금도 두 팔을 벌리고 기다려주시는 예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솔직하게 예수님 앞에 나아가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눅 7:47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은사가 있어 신비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은 영적으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면서 은근히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은 죄인이었으며, 오직 은혜로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음이 겸손한 사람, 예수님을 정말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의롭다 여겨 주실 것입니다.
히 12:3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 말씀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거역한 죄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모든 이가 죄를 범하였고,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즉 이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죄인들’은 바로
죄 가운데에 있었던 저와 여러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일들을 다 참아주시고, 그래도 우리를 사랑해주시며
지금도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십시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좌절하여 절망하는 마음, 스스로를 정죄하면서 영적으로 침체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는 모습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주시며 기다려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잊지 마시고
어서 다시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눅 11:9-13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끝까지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열심히 구하고, 부단히 찾고, 문을 두드리십시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진리의성령교회 가족 여러분
잘난 그리스도인, 못난 그리스도인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부끄러운 죄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넘어질 때가 있으며,
언제 또 마음을 지키지 않아 죄를 범하게 될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인 것이 사실입니다.
뭇사람들이 보기에는 영적으로 장성하여 완전해 보이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역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계속 돌아보면서
치열하게 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영적전투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치열하게 영적싸움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믿음이 참 좋아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회칠한 무덤과 같이 자신의 더러운 것들을 은밀히 감춘 채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나고, 어떤 체험도 했다 하고, 특별한 은사도 받고 그랬다는데
나는 믿음이 없다, 또 죄를 범했다, 구제불능이다.‘ 하면서
좌절하여 예수님을 슬프시게 해드리지 마시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답게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변에 거룩해 보이는 사람을 우러러보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보다도 그 사람을 더 의지하거나
자기 자신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갖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그리 길지도 않고, 사실 별것도 없습니다.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흘러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 구제불능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하루, 하루 예수님 닮아가며 사랑하고,
마지막 날이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자신은 늘 완전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미혹 없이 100% 잘한다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말하지만
우리 중에는 자기 자신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솔직히 어떤 날은 마음 잘 지키지 못하는 날이 있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좌절하는 마음이 드는 날, 슬픈 날, 염려하는 날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결코 절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 예수님 앞에 속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천국에 하향지원하여 안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되
예수님과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쉽고 가볍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절망하여 좌절하지 아니하고,
나를 포함한 모두가 죄인이었고,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사람들도 그저 무료로, 은혜로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자신도 겸손하게, 늘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답게 매일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구원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 115:9
(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42:5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고후 4:8-10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진리의성령교회 윤경훈 목사 올림
진리의성령교회 2019.06.16.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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