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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공간**/스펄전 묵상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 스펄전 묵상

by With Lord 2016. 4. 9.

4월9일

아침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 누가복음 23:27


  구주를 죽음으로 몰아간 폭도들 사이에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자신의 쓰라린 마음을 보여 준 복된 영혼들이 있었습니다. 슬픈 행렬에 적합한 음악이 동반된 것이지요. 내 영혼도 상상을 통해 구주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경건한 여인들 속에 끼어들어 함께 울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슬퍼할 만한 충분한 이유 ― 슬피 울던 여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더 깊은 이유 ―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죄하신 분이 그토록 학대를 받고, 그토록 온유하신 분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보다 더 슬퍼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죄가 거룩하신 주님의 어깨에 상처를 낸 채찍이고, 그 이마에 피를 흘리게 한 가시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부르짖고, 그 자비로운 어깨에 십자가를 매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기 위해 끌려가신 것은 한 번의 시간만 울면 되는 슬픔이지만, 내가 바로 그분의 살인자였다는 것은 그 이상, 아니 무한히 영원한 시간으로 울며 눈물의 샘을 만든다 해도 그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들이 왜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슬퍼했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내 마음이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사랑과 슬픔의 이유가 그녀들에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자기 아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을 고침받았지만, 나는 훨씬 더 큰 죄의 질고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몸에서 일곱 귀신이 쫓겨나가는 역사를 체험했지만, 나에게서는 군대 귀신이 쫓겨나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님이 자기 집을 방문하는 사랑을 받았지만, 나는 그분과 함께 사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는 그분의 몸을 낳아주었지만, 그분은 내 안에서 영광의 소망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이 경건한 여인들 못지않게 나 역시 감사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 마음은 사랑과 슬픔으로 나누어지고

      내 눈물은 그분의 발을 씻겨 드리리.

      마음은 항상 잔잔하지만,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울어야 하리."


저녁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 시편 18:35


  본문은 "주의 선하심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모든 위대함을 자신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함의 결과로 돌리고 감사했습니다. 또 주의 온유함은 "주의 섭리"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섭리는 행동으로 펴현된 선하심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선함이 꽃봉오리라면 섭리는 꽃입니다. 또는 선함이 씨라면 섭리는 그 열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주의 도움"을 번역하기도 합니다. 주의 도움은 섭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섭리는 성도들이 든든한 협력자로서, 그들이 주님을 섬기도록 도와주는 역활을 합니다. 또는 다르게 말하면 "주의 겸손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포괄적으로 이해할 때, 앞에서 언급된 개념들을 하나로 묶어서 말한다면, 겸손이라는 말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원인이 크면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는 작아집니다. 우리는 참으로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크심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발 아래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셔야 하늘을 바라보시고 천사들이 하는 일들을 확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자신의 눈을 더욱 낮추셔서, 자기를 낮추고 죄를 뉘우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크게 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70인경에는 "주의 징계 ― 아버지의 사랑의 매 ― 가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칼테아 성경의 의역을 보면, "주의 말씀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똑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위대함을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의 겸손한 선하심의 결과를 봅니다. 오늘 저녁 우리의 면류관을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부르짖을 때, 이 감정이 우리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유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요! 그분의 가르침은 얼마나 온유할까요! 그분의 계획은 얼마나 온유할까요! 오 성도여, 이 주제에 관해 묵상하십시오. 감사를 일깨우십시오. 겸손을 심화시키십시오. 오늘 밤 잠들기 전에 사랑을 회복시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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