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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공간**/스펄전 묵상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 스펄전 묵상

by With Lord 2016. 4. 7.

4월7일

아침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 시편 4:2


  한 유명한 저술가가 눈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하늘의 왕에게 어떤 영광들을 돌렸는지 그 항목들을 슬픈 심정으로 적어둔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들은 주님께 영광의 행렬을 보여드렸습니다. 로마의 병정들과 유대의 제사장들, 그리고 수많은 남녀 백성들이 그 행렬에 참여해서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호위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최대의 원수를 정복하기 위해서 오신 분에 대한 세상의 환영행렬이었습니다. 조롱하는 외침들은 주님을 환영하는 유일한 함성이었고, 잔인한 모욕은 그분을 찬양하는 유일한 찬가였습니다. (2) 그들은 주님께 영광의 포도주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향기로운 포도주를 금잔에 담아 드리는 대신 죄수의 감각을 마비시켜 죽음의 고통을 잊게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주님께 드렸으나 주님은 죽음의 고통을 그대로 맛보시기 위해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후 그분이 다시 "내가 목마르다"고 부르짖자 그들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신 것을 갈대에 꿰어 그분의 입에 갖다 대었습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찌 이토록 비열하고 지독한 대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3) 그들은 주님께 영광의 보초들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옷에 대해 제비뽑기를 해 그것을 나누어가실 정도로 그분에 대한 존경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4인조 잔인한 보초들이, 천국의 보좌에 앉아 경배를 받으실 분을 호위한 자들이었습니다. (4) 그들은 주님께 피로 얼룩진 나무 위에 영광의 보좌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 그들의 왕이신 주님께 이보다 더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할 리가 없습니다. 사실 십자가에는 이 세상이 주님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이 충분히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우리의 방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5) 그들은 주님께 명목상 "유대인의 왕"이라는 영광의 칭호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눈먼 백성들은 결정적으로 그 칭호를 거부하고, 실제로는 "강도들의 왕"으로 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이렇게 모든 면에서 사람들에 의해 수치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영원한 세계에서 성도들과 천사들의 눈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저녁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죄가 주의 공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 시편 51:14


  이 엄숙한 고백 속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음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그것을 우연한 살인으로 부르지도 않았고, 또 부주의로 불행한 사건이 선한 사람에게 일어난 실수로 부르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그 진짜 이름을 따라 피 흘린 죄라고 부릅니다. 그는 밧세바의 남편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가 죽임을 당하는 일은 다윗의 마음속에서 계획되었고, 그는 여호와 앞에서 살인자였습니다. 우리도 고백 속에서 여호와께 솔직하기를 배웁시다. 더러운 죄들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지 마십시오. 최대한 더 악한 이름으로 부르십시오. 죄는 결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시는 대로 당신도 느껴야 합니다. 마음에 솔직히 느껴지는 그대로 죄의 참된 면모를 인정하십시오. 어떤 말들을 사용하기는 쉽지만, 그 말들의 의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편 51편은 죄를 깊이 회개하는 영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상한 마음을 갖도록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로써 아무리 그럴듯하게 표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용서받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 안에 진지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참된 이름이자 직분입니다. 더욱 좋은 것은 본문은 그분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송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분께 나아갈 때에만,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다짐을 하면서 고백을 끝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다면 그는 찬송할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그는 "크게 노래할 것입니다." 누가 이 같은 자비에 대해 다른 방법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노래의 주제인 "하나님의 공의"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배로우신 구주께서 이루신 사역에 대해 노력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더 크게 노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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