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보공간**/스펄전 묵상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르모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 스펄전 묵상

by With Lord 2016. 5. 27.

5월27일

아침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르모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 사무엘하 9:13


  므비보셋은 왕의 식탁에 어울리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식탁의 한 자리를 계속 차지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그의 얼굴에서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므비보셋처럼 우리도 영광의 왕께 "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에서 자신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자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허락하십니디다.

  주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 때문에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독생자에게 베푸시는 사랑 때문에 그의 사랑하는 연약한 형제들을 가난과 비천함으로부터 일으키시고, 왕궁에서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높은 자리에 앉게 하시며, 궁중의 음식을 먹게 하십니다. 그들이 불구라고 해도 그 특권을 빼낫기지 않을 것입니다. 절름발이라고 해도 아들이 되는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지체불구자라고 해도 아사헬처럼 달릴 수만 있다면 충분히 그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의 힘이 약할지라도 박탈당하지 않습니다. 왕의 식탁은 절뚝발이에게는 아주 훌륭한 피난처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잔칫상에서 결점 속에서 영광을 얻는 법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극도의 불구는 가장 사랑받는 성도의 인격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지만 두 다리를 다 저는 심한 불구로 인해 그는 왕이 성을 도망칠 때 함께 갈 수가 없었고, 그 결과 그의 종 시바의 모략으로 해를 당하게 됩니다. 믿음이 약하고 지식이 부족한 성도들은 크게 손상을 당합니다. 그들은 많은 원수들에게 노출되어 있고 왕이 가는 대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 질병은 자주 타락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 잘못 양육을 받게 되면 종종 성도들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절망에 빠져버리고, 그 죄는 또 다른 뼈를 부러뜨려 놓습니다. 주여, 절름발이가 숫사슴처럼 뛰어놀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모든 백성들이 당신의 식탁에 있는 떡을 먹고 만족하게 하소서!


저녁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 사무엘하9:8


  만일 므비보셋이 다윗의 사랑 앞에서 이토록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우리는 은혜의 주님 앞에서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할까요? 우리는 받은 은혜가 크면 클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더 작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빛처럼 우리의 불순함을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성도들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너무나 분명하고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을 어디에 비교할지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성도였던 러더퍼드는 "나는 말라 시들어진 가지요, 죽은 시체조각이요, 마른 뼈다귀로, 지푸라기조차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는 "불의한 성질을 폭발시키는 것 곧 유다와 가인이 가진 것 말고는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썼습니다. 자연계의 가장 가장 미천한 존재들도 그것들이 죄에 물들지 아니했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보다 나은 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는 탐욕적이고 난폭하고 불결하지만, 성령을 거스리는 양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개는 별로 가치가 없는 동물이지만, 조금만 사랑해줘도 곧 주인을 끔찍이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의 사랑을 금방 잊어버리고, 그의 부르심에 따르지 않습니다.

  '죽은 개'라는 말은 무가치함에 대한 가장 강렬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욱받은 신자들의 자기혐오를 표현하는 말로는 절대로 강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짓 겸손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것을 위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소의 저울로 자신을 달아보고 자기들의 본성의 허탄함을 발견해냈습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흙이요, 움직이는 먼지에 불과하고, 단순히 걸어다니는 무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들로서 바라볼 때 우리는 참으로 극악무도한 피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님이 이처럼 미천한 존재들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하늘이 주신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먼지와 재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넘치도록 크신 은혜를 찬양"해야 하고, 또 찬양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하늘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었겠습니까? 그분은 신부를 얻기 위해 이 게달의 장막으로 나아가 태양이 비추는 신부를 택하지 않겠습니까? 오 하늘과 땅이여, 찬송을 불러 사랑하는 우리는 주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지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