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편
[개 요]
주제-이 시에 머리말이 없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시를 시 9편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그 구성이 완전한 하나의 독립된 시로 본다. 지금까지 어떤 시들은 두 편의 시가 쌍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시 1편과 2편, 시 3편과 4편). 이처럼 이 시도 시 9편과 쌍을 이루고 있다.
악인의 압제와 박해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으므로 이 시의 제목을 “압제받는 자의 부르짖음”이라고 붙여 보았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 시편 기자의 깜짝 놀라는 외침에는 이 시를 쓰게 된
의도가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가난하고 박
해받는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개입해 주실 것을 간구
한다.
2-11절 압제자의 특성을 힘있게 묘사한다.
12절 1절에 나타났던 시편 기자의 외침이 다시 터져나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13-15절 하나님의 눈은 악인의 모든 잔인한 행동을 감찰하신다.
16-18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압제받는 자를 위해 심판하실 것을 기쁨 가운데 기다린다.
박해받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교만한 죄인의 손 아래서 신음하는 성도들은 이 시에 나오는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리기에 적합하다.
[강 해]
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고난당하는 자의 눈물어린 눈에는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시며 압제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 듯하다. 아니, 이보다도 더욱 심해 보인다. 하나님은 '멀리 서 계시고' 이제는 더 이상 환난 날에 도움이 되시지 않는 것이다. 그분은 어느 누구도 오를 수 없고, 가까이할 수도 없는 산처럼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다.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면 그분의 백성들은 평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와 늘 동행하심을 항상 기억하자. 금을 제련하시는 분께서 금을 용광로에 넣으실 때에 용광로 가까이 계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이 그곳에 던져질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그 불꽃 가운데 함께 거니신다. 그분은 또한 사람의 연약함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급하고 험한 일로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버리심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며 염려하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으로 심령이 상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숨기시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심령이 상한다. 우리가 시련을 당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우리를 엄습할 때에는, 바울이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서 배가 파선되고 곤경을 당했던 것과 같은 곤경을 당하게 된다(행 27:41). 이런 상황에서 앞 부분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뒷 부분은 큰 물결에 파손돼 나간 배처럼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식 현상에 의해 태양이 일그러진다면 빛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어찌하여 얼굴을 숨기시나이까?"라고 묻는다면, "그럴 필요가 있다"라는 사실에서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시련 가운데 근심할 필요도 있다(벧전 1:6).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면서도 또한 위로의 빛을 비추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면서 동시에 위로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징계를 하는가? 미소 짓는 얼굴과 징계하는 채찍은 서로 어울리는 친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실 때에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때려 아픔을 느끼게 하신다. 아픔을 느끼는 고난만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고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의 강이나 시내를 건널 때마다 하나님의 팔에 안기어 건넌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임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또한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도 없을 것이다.
2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6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1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2절.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이 구절은 악인에 대한 공개적인 공소 사실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교만'과 '포학함,' 두 가지의 책망이 들어 있다. 전자는 후자의 뿌리가 되고 원인이 된다.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이 구절에는 압제당하는 자의 간절한 간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당연한 기도이다. 우리의 원수들이 재판장이 되어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기를 바랐던 그대로 당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의 저울로 무게를 재고, 그들의 그릇으로 부피를 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 너, 핍박을 일삼던 바벨론아! 너희들의 마지막 날이 끔찍할 것이다! 그날이 되면 너희들이 성도들의 피로 넘치도록 가득 채웠던 잔을 너희가 마시게 될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힐문할 것인가? 그분은 하만이 만든 교수대에 하만 자신을 달아매셨듯이, 사람들이 각자 만든 자신들의 교수대에 그들을 달아매실 것이고, 여호와의 다니엘들을 사자들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던 자들을 거기에 던지실 것이다.
3절. 악인에 대한 공소장을 읽고, 고소자의 소원을 제시한 다음, 이제 그 증거가 제시된다. '교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증거가 광범위하고 확실하다. 그러므로 어떤 재판관도 피고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 증거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첫번째 증인은 그를 교만하게 자랑하는 자라고 했다. 그는 단순한 "소욕"을 자랑했다. 그의 소욕은 헛된 것이기에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가 후안무취하여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부끄러운 것을 자랑하다니, 이 사람은 버림받은 죄인임에 틀림없다. 교만하게 자랑하는 죄인들, 특히 더러운 욕망, 너무나도 추잡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은 가장 추악하고 천박한 자들이다. 선을 미워하는 자와 고집불통이 함께 손을 잡게 되면 그들은 마귀가 원하는 것을 행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피고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를 옥에 가두라! 그러나 잠깐만! 여기 또 다른 증인이 증언할 것이 있다.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KJV에는 "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멸시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두번째 증인은 탐심을 품은 자를 비열하게 축복하는 것에 대해 증언했다. 여기에는 교만한 자의 태도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교만한 자의 가면 뒤에는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 오만한 자는 온 땅의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감히 대적하며,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자를 축복하고 있다. 말라기의 시대에 행악하는 세대가 이처럼 행했다. 그들은 교만한 자를 행복한 자라고 불렀으며, 악을 행하는 자를 칭찬했다(말 3:15). 이 천박한 자들은 그들을 지으신 조물주와 다투면서 이렇게 살아간다.
하나님의 손에서 무게를 재는 저울과
징계하는 채찍을 빼앗으라.
하나님의 정의를 다시 헤아려 판단하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가 되라.
악인은 탐욕스러운 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그들처럼 착취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말을 자주 들어 오지 않았던가?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많은 지갑을 가진 자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교만이 탐욕을 만나면, 그를 지혜로우며 생각이 깊다고 칭찬한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 교수들도 부자를 보면 그에게 깎듯이 대하며 아부한다. 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의 살과 피를 취하여 자신을 살찌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이처럼 대한다. 죄인으로서 존경과 환영을 받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탐욕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간음한 자나 술 취한 자를 교회 밖으로 내어쫓는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자를 징계했다는 교회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있는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스러운 자를 축복하지 말자. 이는 교만의 죄이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이다. 이 교만과 반역의 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두려움 가운데 떨자.
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증인들이 말한 대로 악인에게 불리한 증거로서 교만한 자랑과 비열한 축복이 받아들여졌다. 이제는 그 자신의 얼굴이 그를 탄핵하는 증인들의 소리가 옳다는 것을 증거한다. 교만한 마음은 교만한 얼굴을, 그리고 굳어져서 꿇을 수 없는 무릎을 만든다. 시계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바늘로 나타나듯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이 때때로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굳은 얼굴과 상한 심령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아테네 사람들은 피고인들을 밤에만 심문하도록 했다. 이는 재판관이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근육의 움직임을 보고 입술에서 나오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 정직함은 얼굴을 빛나게 하고, 비열함은 눈을 통해서 뿜어나오는 법이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교만한 자가 결국 어떻게 되는지 보라. 이 교만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한다. 곧은 목, 굽혀지지 않는 무릎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벼의 껍질이 아무리 많이 쌓인다 해도 거기에 알곡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악인의 마음이다. 이 말은 악인에게 치명적인 책망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지옥의 권세가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들은 우리로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5절.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그가 걷는 길은 거친 길이다. 지옥을 향한 길은 거친 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옥을 향해 걸을 때에는 슬픔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길을 울타리로 막으셨다. 아! 이 울타리를 넘어서 가시덤불에 떨어지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가 걷는 길은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슬픔과 요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에 무슨 상관을 하겠는가? 그는 자신의 괴물스런 차를 타고 질주하는 우상과도 같아서, 질주하는 동안 부딪혀 깨어지는 군중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그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나 저 높이 계시는 하나님께까지는 안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으니 그분의 심판도 역시 잊어버렸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돼지가 망원경을 통해 별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여호와의 의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빠를 것이다.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대적하고 다스리려고 한다. 사람들이 그의 가혹한 행동을 책망하거나 저항하는 빛을 보이면, 그는 이들을 비웃고 냉소하면서 모두 멸절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아! 그러나 그의 멸시와 위협을 받지 않을 자가 아직 남아 있다. 죽음! 죽음이 그의 생명의 불을 꺼 버린다면, 이 악한 자가 무덤 안에서 아무리 교만을 떨어 보아도 어떤 유쾌함도 누릴 수 없고, 그저 어둡고 우울할 뿐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6절.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이 구절은 죄인이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바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죄인에 대한 첫번째 책망은 그가 '교만'하다는 것이었다. 이 구절은 그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극명하게 나타내 준다. 죄인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증언하는 자가 그 죄인의 마음속에 은밀히 들어가 그곳에서 들은 말을 전해 준다. 아! 이 사람은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그가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전능한 자로 간주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 특혜를 받은 자로 간주한다. 그는 홀로 앉아서, 어떤 슬픔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별들 가운데서 오만스럽게 거하면서, 그를 그 높은 곳에서 뽑아 버리실 지존자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요,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처럼 요동하는 기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그의 방호벽이 되지 못한다. 자만심은 대적에게 쉽게 정복당하는 취약한 성벽과 같다. 이것은 바보들이 당하는 폐해이기도 하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성공하게 되면,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고 자만심으로 부풀린다. 마치 그들의 여름이 영원히 지속되고, 그들의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아! 사람아! 너는 겸손하라! 인생은 유한하며, 영원한 존재가 아님을 기억하라!
이제 죄인을 기소하는 두번째 문제, 즉 그가 '포학함'을 증거할 때다. 사람이 교만하고 오만하다는 것은 그가 곧 복수하기를 좋아하는 잔인한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증거하는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만의 교만은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잔혹한 계획을 세우는 뿌리가 되었다. 느부갓네살은 우상을 세웠고, 교만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에 굽혀 절하라고 했다. 이후 그는 잔혹한 마음을 품고서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일곱 배나 더 뜨거운 불 속에 던져 넣도록 했다. 모든 교만한 생각과 잔혹한 생각은 쌍둥이와도 같은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자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잔혹한 군주가 되는 것이다.
7절.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법정에 서서 악인의 악함을 증언하는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악한 자가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게 해 보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자신을 정죄할 것이다. 그 입은 악으로 충만해 있다. 머리가 세 개 있는 독사가 꼬리를 틀고서 그 모든 독을 검은 입 속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내뱉는 말에는 저주가 가득하고, 조심성이 없는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는 데에는 궤휼이 가득하며, 또한 주위 사람들을 강탈해 가는 데에는 포학이 가득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이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말아야 한다. 거위처럼 바보 같은 자가 늑대의 설교를 들으러 가며, 가장 어리석은 자만이 악인들의 사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사람의 입만 바라보지 말고, 그의 혀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라:"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는 아직 내뱉지 않은 말이 있다. 이것들은 잔해와 죄악으로 나타날 것이다.
8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이 천박하고 사악한 자는 자신을 자랑하지만, 그는 잔혹하고 비겁한 겁쟁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강도질을 하는 자와도 같다. 이런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길에 숨어 있다가,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다니는 여행객을 덮치는 자들이다. 어느 곳에든 성도들을 기다리고 엿보는 악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땅은 강도들과 도적들의 세상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는 무장을 잘해야 한다. 어느 숲속에든 원수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어느 곳에나 우리를 잡으려고 쳐 놓은 함정이 있고, 피에 굶주린 원수들이 있다. 저 멀리뿐만 아니라 우리 바로 곁에도 원수들이 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
9절.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시편 기자는 악인의 모습을 더욱 어둡고 추악하게 묘사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강도의 모습뿐만 아니라 사냥꾼의 모습, 그리고 숨어 기다리는 사자의 모습도 들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이 꼭 들어맞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숨어 감시하고, 왜곡하고, 비방하고, 수군거리며, 거짓 맹세로 의로운 사람을 비방하고 무죄한 자를 살인한다. 또한 변명, 저당, 동맹 등으로 가난한 자를 사로잡고 그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크리소스톰은 이처럼 극도로 잔혹한 자들을 매우 신랄하게 꾸짖었다. 형제들이여! 참으로 조심하라. 형제들을 노리고 있는 함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자는 어느 동굴에든 숨어 기다리고 있고, 사악한 자들은 어디든지 그물을 던진다는 것을 기억하라.
퀄스는 우리가 당하는 위험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너를 쫓는 자가 그 손으로 행하는 것은
네가 부할 때에도 덫을 놓고,
가난할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명성을 얻을 때에도 덫을 놓고,
수치를 당할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높아진 때에도 덫을 놓고,
낮아진 때에도 덫을 놓네.
너의 침실에도 너를 살피는 덫을 놓고,
활동하는 중에도 덫을 놓으며
네 생각에도 덫을 놓고, 네 말에도 덫을 놓는다네.
네가 침묵할 때에도 덫을 놓고,
소동을 일으킬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절제하는 중에도 덫을 놓고,
헌신하고 있을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확신 중에 있을 때에도 덫을 놓고,
의심하고 있을 때에도 덫을 놓네.
네 마음에도 덫을 놓고, 네 행동에도 덫을 놓으며
네 머리 위에도 덫을 놓고, 발 아래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질병 가운데 있을 때에도 덫을 놓고,
네가 죽을 때에도 덫을 놓는다네.
오, 주여! 당신의 종들을 지키시고,
우리를 모든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소서.
10절.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사람들은 종종 악한 의도를 행하기 위해 겉으로는 겸손한 척한다. 사자가 구푸리는 것은 더 힘껏 멀리 뛰기 위한 것이며, 이렇게 해서 먹이를 덮치고자 함이다. 늙어 교활해지고 사람의 피를 맛본 이리를 보면, 옛 영국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이리를 조심해라!" 그러나 우리는 "여우를 조심해라!"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 발 아래서 엎드리는 것은 우리가 넘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고 조심해라. 우정과 아첨은 원수 사이와도 같다.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6절에서 악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증언하는 자가 있었다. 그 증언은 유효하다. 이제 악인의 마음속에서 주고받는 말을 들었던 증인이 다시 나타난다. 그가 악인이 마음속으로 뭐라고 말했는지를 이렇게 증언했다. 이 잔혹한 인물은 하나님이 눈이 멀었거나, 또는 최소한 건망증으로 잊어버리셨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바보들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모두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찌 감히 그분의 백성을 학대할 수 있겠는가? 사실 "오 하나님이여! 당신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나이다"라는 생각보다 우리를 죄로부터 잘 보호해 주는 것은 없다.
위와 같이 법정에서 심문이 진행되었다.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드러났다. 이제 박해받았던 고소인이 머리를 들고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 자연스런 순서가 될 것이다. 다음에 계속되는 내용은 바로 이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12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말씀을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강한 확신 가운데 있을 때에도 의심하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여호와를 깨우며, 그분이 일어나 손을 드실 것을 간구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여호와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잊어버리기라도 하셨다는 듯이, 소심하게도 가난한 자를 잊지 마실 것을 간구했다. 이 구절은 교회가 끊임없이 부르짖어 간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고 교회의 모든 대적들을 벌하시기까지 교회는 이 기도를 쉬지 않을 것이다.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5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여기에는 악한 자에 대한 묘사가 농축되어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그의 악한 성품을 그 근원까지 추적한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사상이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여호와께서 그 능력을 보이시고 공의를 나타내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악인이 하나님의 의를 문제삼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 가운데 그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가르치실 것을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13절.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이 구절에는 경건치 못한 자의 소망, 그의 마음의 소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그가 여호와를 멸시하는 이유는, 그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다른 사람을 위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멸시하는 자를 위해서만은 지옥이 있어야 한다. 악인의 사악한 생각에 대한 표현이 14절에 나타난다.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하나님의 눈은 모든 것을 보시고, 그분의 손은 원수들을 심판하고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눈에서 숨어 피할 자가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에서 도망할 자도 없다. 방탕하게 잔해를 행하는 자는 심판과 비극을 맛볼 것이며, 원한을 마음속에 품는 자는 슬픔을 거둘 것이다.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진정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렇게 심판 중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압제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압제당하는 자를 가까이하는 자비로운 분이시다.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 버렸다. 압제자에 대한 판단도, 자신들의 의지도 모두 온전히 그분께 맡겨 버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안식하는 것이다. 그분은 이런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고난당하는 시기에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에 즐거워하게 하신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육신의 아버지가 땅 속에서 잠을 잘 때, 하늘 아버지는 하늘 위에서 미소를 지으신다. 어찌 되었든지 고아들은 굶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지낸다. 그들에게 하늘 아버지가 계시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15절.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가 간절히 간구하는 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 죄인들로 죄를 범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하소서. 잔학하게 행하는 자를 막으시고, 압제자를 체포하시고, 세상에서 강한 자의 허리를 약하게 하시고, 사악한 자를 던져 산산이 부수소서. 그들이 공의를 부정하오니 이것을 온전히 맛보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죄인을 추적하실 것이니,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그에게 죄의 씨가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찾으시고 벌하실 것이다. 성도들을 크게 핍박하던 자들이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죽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저주가 그들을 끝까지 추적할 것이고, 그들이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면서 한때 저항했던 하나님의 공의를 그때가 오면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압제자들이 잠시 성도들을 핍박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성도들 중에 위선자가 섞이지 않도록 울타리를 치고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성도들을 교훈하신다. 기드온도 숙곳 사람들을 광야의 찔레로 교훈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곧 하나님께서 가시와도 같은 헤롯들을 모두 잘라 불 속에 던져 버리신다. 그리스의 현자인 탈레스(Thales)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압제자가 노인이 되도록 사는 것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의 팔을 꺾을 뿐만 아니라, 교만한 압제자의 목도 꺾어 버리신다. 성도들을 향해 어떤 공의나 긍휼도 베풀지 않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공의를 베푸실 것이며, 긍휼의 씨앗은 한 톨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16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6-18절. 시편 기자는 위대하고 영원하신 왕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로 끝을 맺는다. 왕께서 가난하고 압제받는 백성들의 소원을 허락하시고, 고아를 보호하시며, 가난하고 박해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짓밟았던 열방들을 벌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평스러운 일들을 왕 중 왕께 올려보내면 그분께서 속히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여호와의 보좌 앞에 문제를 들고 나아가면 여호와께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시고 잘못된 것들을 다시 바로잡으신다. 그분은 가난한 자의 이익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강한 자의 압제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위대하신 하나님이여, 당신의 손에 우리를 맡기나이다. 당신께 당신의 교회를 새롭게 의탁하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이 땅의 사람들, 하루살이 같은 존재들로 당신의 권능 앞에서 부러지게 하소서. 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당신의 백성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아멘. 아멘.
[주해와 설명들]
시 10편 전체.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하는 생각, 태도, 하는 일과 말, 감정, 운명을 이 시가 가장 적절하고 자세히, 그리고 통찰력 있게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악인에 대해 지금까지 묘사한 것 중에 부족한 것이 있다거나, 앞으로 나오는 시에서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 시에서 악에 대한 완벽한 묘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사람의 눈에는 훌륭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사람에 대해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과 그 이후의 사람들은 이 시를 '적그리스도의 시'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시에는 아무런 머리말도 없다는 사실을 유의하여 가장 일반적인 이해를 받아들이고, 이 시가 경건치 못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자.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또한 이 시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시라는 견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이 시를 앞에 나오는 시 9편과 연관지어서 이해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시 9편에서 다윗은 불경건한 자가 회심할 것에 대해 말했고, 또한 회심할 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는 아직도 회심하지 않은 불경건한 자, 자신이 힘이 있다고 약한 자를 압제하는 자, 앞으로 회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1절.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숨지 않으셨더라면 환난의 때가 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밤에는 왜 해가 비치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해가 비쳤더라면 결코 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 미소를 거두셔야만 우리는 이 환난에서 온전히 교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는데, 이 시련을 통해서 무거운 마음도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매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시련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 하나님께서 숨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아픔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 결과 그분의 징계를 통해서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C. H. S.
1절. "환난 때." 우리가 당하는 환난의 때는 우리에게 확신의 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는 자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그 마음이 굳게 정해지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경박한 자가 되어서 여러 가지 악한 사조에 흔들리며, 우리가 듣는 소식에 따라서 소망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기도로 강청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배 안에서 지극히 작은 믿음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믿음이 폭풍 가운데서 주님을 깨웠고, 주님은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다. 우리의 불신은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하나님으로 그분의 능력을 베풀지 못하게 할 뿐이다. -스티븐 차녹.
2절.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압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나는 법적으로 내 소유인 것만을 추구한다. 그는 자신의 자유 의사를 따라 나와 계약을 맺었다. 그가 계약을 지킬 수 없다면, 나는 그의 물품과 육체를 취할 수 있다. 나는 계약을 따라 그의 물품과 육체를 취하든지, 아니면 내 돈을 받으면 그만이다. 그의 자녀들이 거지가 되어 소진해 간다거나, 그의 교만한 아내가 망한다 해도 난 상관하지 않겠다. 그들이 망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 그것이 도대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난 돈을 받아야 해. 그가 몸과 뼈를 깎는 고초를 겪더라도 내가 받을 돈은 다 받아야 해. 법이란 공의롭고 선한 것이지. 이 법을 따라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행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업가가 100을 얻어야 하는데 30만 받고 나머지를 포기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 그저 지푸라기나 잡으려고 태어났단 말인가? 그들의 눈물 몇 방울 때문에 나의 즐거운 삶을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울음이 한밤중에 짖는 개처럼 내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내 돈을 받든지, 그의 뼈를 받든지 해야 한다······내게 양심을 말하지 말라. 내 사업에 양심이란 없다. 세상의 모든 게으른 자들보다도 이 양심 때문에 파산당한 사람들이 많다. 내 양심은 바보가 아니야. 내 양심은 내가 소유한 것만이 진정한 내 것이라고 가르쳐 주지. 속이 가득 차 있는 돈가방은 나를 속이지 않아. 내 친구들이 모두 나를 버릴 때에도 이것은 내게 가까이 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법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나쁜 양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다른 사람들의 것을 움켜쥐고 그들을 압제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 세상은 냉혹한 세상이지. 이런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무엇이고 움켜쥐지 않으면 안 되지. 난 줄 것은 주고, 빌려주는 것은 빌려줄 뿐이다. 거지가 되어야 천국에 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라지. 네가 압제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난 법을 따라서 살 뿐이니까. 그러나 압제자와 압제받는 자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난 압제를 받는 것보다는 압제하는 자가 되겠다. 빚진 자들이 정직하게 빚을 갚는다면, 내 손을 묶어 두고 잠잠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하여 내 지갑이 비게 된다면,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들로 마땅히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지." -프란시스 퀄스.
2절.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악명 높은 박해자 도미티안(Domitian)은 로마의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처벌할 용광로를 일곱 배나 뜨겁게 했다. 이와 같이 로마의 교황도 '세상의 주' 그리고 '온 세계의 아버지'라는 신성 모독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때, 주님께 신실했던 자들을 피로 압제하기 시작했다. 교만은 박해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C. H. S.
2절. "교만." 교만이란 사람들의 마음에 속히 들러붙는 악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하나 하나 벗겨 간다면, 가장 단단히 붙어 있어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교만일 것이다.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
3절.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악인은 그의 악한 삶을 자랑한다. 이 말은 그가 사악한 계획을 성취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랑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자들을 칭찬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오직 자신과 같은 사람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만 칭찬한다는 말이다(참조. 시 36:4; 49:18; 롬 1:32). -조반니 디오다티(John Diodati, 1648).
3절.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KJV에는 "악인은······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니"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람들은 서로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주의 계명을 모두 무시하는 자들은 여러 가지 추한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죄를 짓는 자를 칭찬한다. 그들은 이렇게 죄를 범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용납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첨하고 칭찬하며, 그들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며 그들을 격려한다. -피터 머펫(Peter Muffet, 1594).
3절. "탐리하는 자." 탐심은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과 세상의 온갖 부귀를 갖고자 바라는 열망을 말한다. 이것이 상업이나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특성은 아닌지, 또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불평하는 불공정 거래의 근본 원인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내 주위에서 갖가지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판단을 들어 보겠다. 우리 조상들은 매일 매일 근면하게 살면서 작지만 고정된 수입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은 이와 대조적이다. 사람들은 단숨에 떼돈을 벌 궁리를 하고 있으며, 날마다 성급하게 돈벌이를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데 이는 지난 삼사십 년 동안 탐심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이 땅에 일어난 산업혁명, 여러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훌륭하고 놀랄 만한 기계들이 수없이 많이 발명되어서 인간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세속적인 마음을 갖게 했다. 그 결과 우리 젊은이들은 성인이 되면서 조상들처럼 정직하게 살고 약속을 지키며 주님의 도우심을 따라 근면하게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한다는 꿈을 갖고서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단번에 큰 돈을 벌어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추구하며 온갖 사치스러운 삶을 즐기고자 한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탐심을 물리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진지하게 부탁드린다. 기독교가 왕성하게 발전한 대영 제국의 대도시는 바로 이런 싸움의 중심부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허영과 탐심의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이렇게 택하심을 받은 것은 세상으로 물러서는 교회에 대해 이 사실을 증언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탐심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것을 그들에게 지적해야 한다. 탐심의 덫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828).
3절.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KJV에는 "탐리하는 자······이는 여호와께서 멸시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 이는 한 사람이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또한 세상도 한 사람의 일부분만 취하려 하지 않고 전체를 모두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천사와 마귀는 모세의 몸을 서로 취하려고 다투었다(유 9절). 그들은 모세의 몸의 일부분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전체를 취하려고 했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모두 취하려고 다투고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하나님과 세상은 서로 대항하는 관계에 있어서, 세상이 일부라도 자리잡고 있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이 일부라도 함께하시는 사람과는 세상이 함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세상을 사랑하려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탐심을 가진 자는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했다(엡 5:5).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다. 반역자가 왕의 궁전에 또 다른 왕을 세우듯이,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자리에 또 다른 신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스미스.
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다윗은 시 10편에서 힘있는 정치가들과 압제자들에 대해 말하는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짐승처럼 자신들보다 더 약한 자들을 희생물로 삼으려 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생각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석하지만, 그 의미는 모두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교활하고 건방진 목적에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해석한다. 이 구절은 악인들의 잡다하게 많은 생각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없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마음속으로 모든 계획과 음모를 꾸밀 때에, 하나님이나 그분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상의해야 할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이 마치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 그분에 대한 생각과 그분의 뜻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상은 그들의 모든 악한 계획과 다른 사람을 해치고 속이는 행위의 근원이 되어 있다. 그들 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 그들을 징계할 분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담대하게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토머스 굿윈.
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악인은 그를 위한 배심원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교만한 자라는 판단을 받았다. 악인은 교만하다는 판결을 받은 후에도 용서를 받기 위해 겸손히 엎드려 순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받기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분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어 간다. 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저주받을 교만이여! 어느 때나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까?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피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데, 사람들은 어느 때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법에 만족할 것인가? 어떻게 감히 사람이 이처럼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사람이 교만 때문에 스스로 파멸을 자초한다는 것을 인정하겠는가? 당신의 구원이 당신에게서 올 수 있는가? 당신은 자신의 죄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치료받으려 하기보다 영원한 사망을 택하겠는가? 스스로 구원하려 하여 저주를 받겠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을 구원하고자 하시는데, 당신은 그렇게 교만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겠는가? 당신에게는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당신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당신은 가련하고, 또 교만하다. 당신은 비참한 존재이건만, 아직도 무엇을 자랑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 특히 영적으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의와 혈통을 자랑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의 의를 의지하여 사람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거절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더욱 멸시하시기 때문이다. -루이스 스터클리.
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악인이 하나님의 지식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가 교만하기 때문이다. 교만은 온갖 방법으로 악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한다. 첫째, 이 교만은 악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묵상하기에 유쾌한 존재가 아니며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한다. 교만이란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분수에 맞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경쟁 상대를 참을 수 없고, 자기보다 우월한 자를 미워하며, 자기 위에 주인을 두고 섬길 수 없다. 교만이 우리 마음에 더 폭넓게 자리를 잡아 갈수록 우리보다 위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게 되고, 우리 자신의 의지 외에는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원하는 것 외에는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여 사탄은 조물주를 대적하게 되었고,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되기를 소망하게 했다. 교만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생각보다 더 교만한 자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그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셨고, 공의롭고 거룩하시며, 어느 누구도 그분을 저항하거나 속일 수 없다. 그분은 자신의 뜻을 따라 모든 피조물과 사건들을 다스리시며, 특별히 교만을 미워하신다. 그분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두려움과 증오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을 자신이 무서워하고 대적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원수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셨고, 그분은 사람이 저항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권위에서 벗어나 그분의 능력을 대항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그분의 처절한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행 가운데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지식은 악인이 보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하여, 그가 하나님을 저항한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설 것을 알게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모든 교만한 사람들보다 하나님은 위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지식은 교만한 자들의 마음을 괴롭고 아프게 하며, 그 결과 그들은 이러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싫어하고,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를 바라고, 그들의 마음속에서부터 그분에 대한 생각마저 추방해 버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가르쳐 주는 계시의 말씀을 무시하고, 왜곡하며,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 것처럼 설명하여 하나님이 마치 그들과 같은 존재나 되는 것처럼 믿으려고 노력한다.
교만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어처구니없으며, 그 사람을 황폐하게 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다가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며 진흙 구덩이로 곤두박질칠 뿐이다. 자신을 위해서 보좌를 세우려고 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 교만은 사탄을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며, 우리의 조상을 낙원에서 추방당하게 한 것이다. 이것을 허용하고 좋아하는 자들도 역시 파멸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며, 우리가 그분을 닮지 못하게 하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얻을 행복과 명예를 얻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교만을 미워하고 이것을 좋아했던 것을 회개하며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 버리고, 지옥으로 안내된 후에는 그곳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문이 닫혀 버린다. 아!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다른 무엇보다도 교만을 조심하시오! 당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탐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교만이란 다른 어떤 죄보다 가장 비밀스럽고, 교묘하게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라오. -에드워드 페이슨(Edward Payson, D.D., 1783-1827).
4절. "교만한 얼굴." 그가 품고 있는 교만은 그의 얼굴과 이마에 새겨져 있어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만 채운다. 그는 어떤 것도 궁금해 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지낸다. -조반니 디오다티.
4절.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고 해석한다. 세네카(Seneca)는 완벽한 무신론자는 없다고 했다. 누군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들이 낮에 이 말을 했다 할지라도, 밤이 되어 그들이 홀로 있을 때에는 낮에 했던 말을 부인한다. 그들이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셔서 그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고백하게 된다.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움에 처하고 넘어지게 되면, 그들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유명한 무신론자 디아고라스(Diagoras)는 극한 고통에 처했을 때, 그가 그토록 부인하던 하나님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무신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가 남아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그들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길 뿐이다. -리처드 스톡.
4절.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경건치 못한 자나 무신론자에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이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잊혀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티븐 차녹.
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KJV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우리에겐 정작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생각을 하면서도, 지속적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잠깐 동안 생각하고 만다. 하나님은 우리와 은혜의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은 왜 이리도 서로에게 이방인과 같은지!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그분의 온전하심을 묵상하지도 않고, 그분의 선하심을 찬송하지도 않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노래하는 시보다도 그분을 노래하는 시가 적은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그들의 이성과 상상의 나래를 접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육체적인 힘과 곡식과 포도주가 주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저주받은 바알에게 바치고 말았다(호 2:8). 우리도 세상의 주를 따르기 위해 하늘을 버리지 않는가. -스티븐 차녹.
4, 5절. 세상의 영적 현혹과 마력에 이끌려 자신과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술 취함과 쾌락에 빠져들고, 쉽게 미치거나 어리석은 일을 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이처럼 헛된 자기 과시를 위해 매우 사소한 일로 큰 분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대하고 굉장한 인물로 보고서 이런 분란을 일으키지만, 사실 세상은 이 일로 그들의 존재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귀하게 생각해 주지는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야수와 같이 변해서 사자나 호랑이처럼 포학하게 살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더러운 욕망에 몸을 맡기고 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이나 애정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억눌러서 위대한 자가 되려고 한다.
카이우스 칼리굴라(Caius Caligula), 아하수에로(Xerxes), 알렉산더(Alexander),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괴상한 행동에 대해서 읽는 자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 마침내 죽게 되는 인생뿐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렇게 했지만, 사람들의 우스갯거리요 어린이들에게까지 조롱당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의 명예와 쾌락에 중독된 자들의 희귀하고 이상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미친 짓을 할 때에도 그들을 제어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4절).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5절).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6절). 이 시는 자신의 이성을 잃어버리고 광기어린 행동을 하는 자를 묘사하고 있다. 마귀가 활동하기에는 세상이 주는 쾌락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리처드 길핀.
5절. "견고하고." 이 말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한다는 말이다. 즉 그가 하는 모든 노력이나 행동은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견고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야힐루"<wlyjy>이며, 이 단어의 원형인 '훌'<lwj>은 '회오리치다', '고통이나 산고로 몸을 비틀다'라는 뜻이 있다-역자 주).
"높아서."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난 공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지극히 육적인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적인 사람은 율법에 나타난 공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롬 7:14; 고전 2:4).
"멸시하며." 그는 가장 교만하게 사람들을 멸시하며, 그들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반니 디오다티.
5절.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하나님께서 죄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어떤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신속히 잘잘못을 가려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죄를 다루시는 방법은 이와 다르다. 그분은 더 고상하며 시간을 두고서 처리하시므로, 악한 자의 눈이 이것을 볼 수 없고 사람의 천박한 지혜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법정에 앉으셔서 판결을 즉각 즉각 내리신다면, 바보들이라도 그분의 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즉각 즉각 심판하시지 않기 때문에 악인들은 더 높은 법정, 곧 하늘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이 더욱 엄숙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도들도 조심하여 그들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말고, 지극히 존귀한 분께서 행하시는 것을 비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너무 높아서 사람의 이성으로 그것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C. H. S.
5절.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며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게 하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땅에 있는 먹이감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발톱을 보지 못하게 하고, 독수리에게 잡힐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땅에 있는 사냥감이 독수리의 발톱을 보지 못하여 두려워함이 없듯이, 악인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죄를 짓다가, 곧 절망하게 된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보시겠느냐?"라고 하지만, 마침내 "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느냐?"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지은 죄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죄가 그를 기억해 낼 것이다. 오만함으로 닫았던 눈은, 두려움으로 열리게 마련이다. -토머스 애덤즈.
5절.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다윗은 교만한 자들을 '대적에게 콧방귀를 뀌는' 자들로 묘사했다(히브리어로 "야피아흐"<jypy>의 원형 '푸아흐'<jwp>는 '숨을 내쉬다', '콧방귀를 뀌다'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멸시"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며 마치 자신이 위대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자만심으로 부풀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무슨 큰 해나 끼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콧방귀를 뀌어 대는데,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저 사라져 가는 한낮 콧방귀나 바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조셉 캐릴.
5절.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저는 그들에게 휘파람을 불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냉담하고 무관심하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처럼 돌보는 일이 결코 없다. 그의 대적이 누구이든 간에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멸시와 조롱이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다. 거룩한 성품을 가진 자와 함께 일하는 법을 잊어버린 자들이다. 그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 내리는 판단이나 의견, 그들의 행하는 것들을 경멸한다. -존 모리슨.
6절.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세상에 속한 것으로 안전을 추구하면 그 영혼에는 경건치 못한 것들이 침투하게 된다. 폼페이(Pompey)는 어느 성을 공략하다가 그 성을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그 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약속을 맺으며 이와 같은 전략을 썼다. 그는 전투에서 부상당한 몇몇 군인들을 그 성에서 받아들이고 치료해 준다면 그 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군인들을 받아들였다. 그 성에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안전하다고 믿고 안심하고 있을 때에 그 군인들은 성문을 열고 폼페이의 군대를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했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 영혼에 탐심의 대군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토머스 브룩스.
6절.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삶이란 편안하기만 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기 전에 그 결과를 얻은 것처럼 축하하는 것, 영적 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의의 면류관을 얻기를 바라는 것, 진정한 위로를 주는 은혜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거짓 된 평안에 만족해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어떤 항해사가 표현했듯이 바다에서 불현듯 당하는 무서운 적막과도 같은 것이며, 지극히 무서운 사건의 전주곡과도 같은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며, 해면이 수정처럼 맑고 유리처럼 잔잔해지면, 아무 경험 없는 여행객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항해사들은 두려움에 떤다. 순식간에 물결이 솟구치고, 바람이 일기 시작하며, 천둥이 치고, 배를 삼킬 듯한 파도가 입을 열며, 하늘에는 번갯불이 번쩍이고, 매순간 밀려오는 파도는 배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듯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풍요로운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자들이다. -제임스 소린(James Saurin, 1677-1730).
7절.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이 무시무시한 표현은 독사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인데, 독사는 이빨 밑에 독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교활하게 목표물에 접근하여 마침내 사정 거리내에 있게 되면, 목표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이 표현은 불신앙으로 오염된 마음이 성도들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가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진리를 왜곡하며 부도덕한 감정과 행동으로 성도들의 마음에 끼치는 해독은 치명적인 독이 몸에 끼치는 해독과 방불한 것이다. -존 모리슨.
7절. "저주." 저주하는 사람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존 트랩.
7-9절. 앤 아스큐(Anne Askew)는 보너(Bonner) 주교에게서 심문받은 것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 기록에는 박해자의 잔혹함이 잘 나타나 있다:"다음 날, 런던에 계시는 내 주인께서는 나와 세시에 만나게 되어 있었는데도 한시에 나를 불렀습니다. 주인님께 나아갔을 때, 내게 매우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며 나를 공격하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내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인님은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비밀들을 모두 털어놓으라고 했답니다. 내가 그의 집에서 말한 것으로 인해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나를 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난 '우리는 세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고, 내 친구들도 세시가 되기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그때까지 내가 말하지 않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베일(Bale) 씨는 이렇게 말했다:"이와 같은 심문에서 바벨론의 교구, 피에 목마른 여우가 먹이를 잡아먹고자 하는 탐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사람들은 혀로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이 있으며, 입에는 가장 잔혹한 복수심을 채우면서, 아무 죄도 없는 자의 피를 흘리기 위해 정말 신속히 움직인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영적인 지도자로 있으면서도 이처럼 미쳐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압제하는 것을 적법한 일로 생각하고, 마치 빵 한 조각을 먹어 치우듯이 아무런 동정심도 없이 그들을 먹어 치우는 것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한 구절이라도 읽었더라면 이렇게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지요. 제레미는 '잔혹한 박해자들은 공중의 독수리보다 더 빨리 움직입니다. 그들은 산을 넘어가면서 우리를 추적하고, 광야에서 우리를 은밀히 기다린답니다. 성도들을 박해하던 교구들이 그들이 희생물로 삼은 자들을 얼마나 교묘하게 다루었는가를 알고자 하는 자는 이 기록에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가룟 유다조차도 그들의 음흉한 계략의 십 분지 일도 갖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베일(John Bale, D.D., 오소리의 주교, 1495-1563, Examination of Anne Askew, Parker Society's Publications).
8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아랍의 강도들은 모래 언덕에 이리처럼 숨어 있다가 혼자 다니는 여행객을 갑자기 덮쳐 물건이나 돈을 빼앗은 후, 광야의 모래 언덕과 갈대밭으로 도망치는데 그들을 추적할 길이 없다. 우리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뒤처지지 않도록 늘 조심을 시키기에 이런 일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강도 사건은 흔히 일어난다. 참 이상한 나라이다! 구약의 역사서, 시편, 선지서에는 이런 일들이 수백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시편 10:8-10에도 이런 표현이 나타난다:"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수많은 악당들, 바로 이 시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악당들이 곳곳에 숨어 기다리며 가련하고 힘이 없는 여행객들을 노리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무장을 하고 있다. 각 성에 있는 대포들이 안전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는 듯하지만, 사람들은 권총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고대로부터 이런 역사를 이어왔다. -톰슨(W. M. Thomson, D.D., The Land and the Book, 1859).
8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내 동료들은 내가 금방 당할 뻔했던 위험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난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리고 "무슨 위험이지요?"라고 묻자 그들은 그들이 떠난 직후에 일어났던 일을 말해 주었다. 어느 험상궂게 생긴 아랍 사람이 땅에 바짝 붙어서 잠복하며 나를 뒤쫓았는데,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권총으로 나를 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권총을 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결정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주위를 살피듯이,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그들 일행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슬그머니 사라져 갔다. 예레미야의 글을 보면 이런 아랍 사람들의 행동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렘 3:2). 이 시의 9-10절에 나오는 내용도 아랍 사람들이 그 해할 자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을 비유하는 데 사용되었다. -존 개즈비(John Gadsby, My Wanderings, 1860).
8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이 모든 강렬한 비유는 진리와 의의 원수들이 그들의 타락하고 사악한 뜻을 이루기 위해 보이는 열심과 교활함과 저질스런 책략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최대 목적은 참된 종교를 근절시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압제하던 세상의 권력들이 이것을 증거한다. 세상의 권세들과 천주교의 교황들이 이처럼 악명을 떨쳤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불쌍한 양 떼들을 잡으려고 문자 그대로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극악무도한 모든 전략을 동원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왕궁에 있는 고귀한 왕자들로부터 동굴에 사는 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시골로부터 사람이 많고 번잡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수색 작업을 펼쳤다. 이 모든 일은 영원히 지속될 이름, 태양이 있는 한 계속될 이름을 지우려는 헛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 모리슨.
9절. "저가······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그들이 사냥하는 동물은 가련한 자이다. 이 가련한 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늦게야 쉬며, 슬픔의 떡을 먹고, 여러 사람과 함께 배고픈 식사를 하고, 어쩌면 그의 자녀들은 배고파 울며, 그가 고통스럽게 얻은 모든 음식은 니므롯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가난한 자를 희생물로 삼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울리는 죄이다. 여호와의 귀는 가련한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실 것이며, 그분의 분노의 손은 이것을 행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가련한 자가 침묵한다 할지라도, 돌들이 외칠 것이다. 구금, 구타, 폭행, 압제, 괴롭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원한을 갚아 주실 것을 간구할 것이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11).
그들이 사냥하는 사냥물들을 보라. 이것들은 이리나 여우나 황소나 호랑이가 아니다. 어떤 야수들도 자기와 같은 종류를 먹어 치우고자 사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런 야수보다도 못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사람이면서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을 사냥한다. 그러나 이 악한 자들은 그들이 사냥하는 가련한 자들과 질이 다른 존재들이다. 이 가련한 존재들은 양과 같아서, 그들 안에는 피와 살이 있고 양털이 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자들이 가련한 자들을 삼키고자 사냥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악한 자들의 잔혹함에서 자신을 보호하기에는 너무도 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이들을 다스린다. 내가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자들을 사냥할 강한 니므롯은 없다. 이 니므롯들은 젊은 네로처럼 자신보다 약한 자, 양처럼 순한 자들만을 공격한다. 그들이 식인종이 아니면 좋으련만. 세난누스가 티베리우스의 호의를 받는 한, 마크로만이 그에게 인사할 것이다. 그를 정상에서 땅으로 내던져 보라. 개들이 그 살을 먹을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9절. "저가······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사람을 압제하는 왕자는 부르짖는 사자와 같고, 재판장은 저녁 이리와도 같다. 이 죄는 자연의 진리와 빛에 역행하는 죄이다. 어떤 피조물도 자신과 동류의 짐승을 해치지는 않는다. 공중의 새를 보라. 독수리, 매, 이들은 결코 자신과 같은 종류를 사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삼림에 사는 짐승들을 보라. 사자, 호랑이, 이리, 곰, 이들은 자신들과 동류의 짐승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대한다. 그러나 유독 사람만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물로 삼는데 마치 바다의 물고기와도 같다. 바다의 물고기들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켜 버린다. -토머스 브룩스.
10절.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들은 사악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수단이라도 효과만 있다면 치사하고 비굴하다고 마다하지 않는다. 무지한 대중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 교황이 순례자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도 볼 것이고, 또한 세상의 왕들을 조종하기 위해서라면 그가 자주색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볼 것이다. -존 모리슨.
10절.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양의 탈을 쓴 이리를 보거든, 그를 교수형에 처해라. 그는 이 세대에서 가장 악한 자이다. -토머스 애덤즈.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과거에 범한 죄에 대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사람이 과거에 지은 죄를 잊었다고 해도,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은 그것을 잊지 않으신다. 영원 전부터 계신 그분께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 이것을 미리 아셨고, 또 죄인은 그것을 다시 범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잊으시겠는가? 아말렉 족속은 고대에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조상들이 무덤 속에서 썩어진 지 오랜 후, 사울 시대에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를 갚아야 했다(삼상 15:2). 옛날에 지은 죄일지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 죄는 우리 자신만의 죄가 아니라, 후손들이 치러야 할 조상들의 죄도 포함되어 있다:"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사 65:6).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이 범한 죄라고 무관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이다. 이 죄악들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기억에서도 사라졌겠는가? 죄란 그 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함께 묶여 있는 것이다:"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호 13:12). 하나님은 사람들이 앞으로 행할 모든 일을 다 아시듯이, 또한 과거에 행한 모든 일도 기억하신다. 하나님께서 곧 잊어버리실 일을 미리 아셨겠는가? 그분에게는 결코 잊음이 없으시다. -스티븐 차녹.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신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보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 얼굴에만 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도 혀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다른 혀는 같은 말을 하는 법이 거의 없다. 우리의 얼굴에 붙어 있는 혀는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피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악한 자들의 마음에 있는 혀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숨으시고, 우리를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사야 선지자 또한 이같이 말했다:"그들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숨기고자 구덩이를 깊이 팠다"(사 29:15, KJV). 이들은 자신의 도모를 숨기고자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땅을 깊이 파고 숨기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계교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계교를 하나님에게서 숨기려 했다. 그리고서 "누가 보겠느냐? 누가 알겠느냐? 사람도, 하나님도 우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조셉 캐릴.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성경은 모든 죄의 뿌리를 여기서 찾는다. 악한 자들이 9, 10절에 기록된 대로 가련한 자를 압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을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쓴 뿌리와 같다. 모든 죄는 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고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거나 희미해지면, 밤새에 사람의 야심과 탐심,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 불신앙, 조급함, 그리고 다른 나쁜 것들이 자라게 된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담대히 악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친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처럼 인간의 타락을 막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없다. -스티븐 차녹.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하나님께서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징계를 지체하시므로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지체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등을 후려쳐서 징계하지 않으시므로,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볼기를 치지 않는 것이다(렘 31:19). 죄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징계하지 않으셨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를 징계하지 않으실 것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때로 하나님은 무한히 인내하시며 징계하기를 연기하신다(벧후 3:9). 꿀벌은 일상적으로 꿀을 내며, 분노할 때에만 침으로 쏜다.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그분과 화목하기를 바라신다(사 27:5). 하나님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며 갚을 시간도 주지 않는 조급한 빚쟁이와 같은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신다:"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사 30: 18).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죄인이 회개하도록 기다리신다. 그러나 아!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인내를 너무나 오용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복수하지 않으시므로, 죄인들은 눈물의 샘을 막아 버린다. -토머스 왓슨.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계속해서 용서하시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을 연장시키시는 만큼, 그들은 탐욕을 더해 간다. 이것은 병을 고칠 의사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자기 뼈를 부러뜨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하나님의 공의가 그들에게 눈짓을 하자, 사람들은 그를 소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심판을 지체하자, 사람들은 그가 심판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그들의 죄를 항상 견책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은 그가 죄를 항상 용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라. 큰 소리나는 포탄뿐만 아니라 조용한 화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인내는 지속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윌리엄 세커.
11-13절. 무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부인한다:"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시 73:11). 이렇게 해서 그분을 보는 눈도 없고 능력의 팔도 없는 무능한 신으로 격하시키거나, 구름 위에 있는 것들만 간섭하는 신으로 제한시키려 한다. 그러나 왕이신 그분을 하늘의 보좌에만 국한시키려 하는 자들은, 곧 그 보좌에서도 하나님을 끌어내리려 하고, 마침내 그분을 정면으로 부인하게 된다. -토머스 풀러.
13절.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한 조종사가 필사적으로 땅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 댔다. 그의 선임자는 그에게 지금은 어떤 법도 그를 제지할 수 없지만 마지막 심판날에는 이 모든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조종사는 "그날이 이르기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내가 당신을 이 비행기에 태우고 가겠소"라고 답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을 압제하는 자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을지라도, 마음속에 이와 같이 자기 기만을 품고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간다. -토머스 애덤즈.
13, 14절.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죄를 짓는 동안 죄의 점수는 올라가고, 재판관은 기억의 책에 이것을 기록하고, 마침내 그 내용이 하나님께 도달하게 된다. 고리대금업, 소작인에 대한 착취, 속임수 카드 놀이, 난잡한 화장, 노름, 영혼을 굶주리게 함, 성직 매매, 이외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더러운 쾌락을 추구했던 행음자, 수천의 영혼을 죽였던 부주의한 성직자, 가난한 소작인에게서 과도하게 돈을 착취했던 지주, 이 모든 자들이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도살할 양처럼 끌려나오고, 하늘과 땅이 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땅이 불에 소멸되는 날,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을 대적하게 될 것이다. 바위가 갈라지고, 산이 흔들리고, 땅의 기초가 떨릴 때에 그들은 산을 향해 "우리를 덮으라. 우리 위에 떨어지라. 우리가 대적했던 그분의 진노와 임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도 숨어 피할 곳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뱀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곳, 그곳으로 가서 영원히 마귀에게서 고통을 받으며 지내게 될 것이다. -헨리 스미스.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하나님은 악인이 그분의 위엄을 대적하며 품었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해명해야 할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 공포심을 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를 짓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그들이 욕망에 불타고, 증오심을 품고 사람을 해하며, 의로운 자를 멸시하고, 무죄한 자를 박해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이 모든 것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이 일을 행한 것이다. 그분은 그들이 들판의 야생 나귀처럼 살아가는 것을 잠시 두고 보셨지만, 마침내는 그들을 찾아내고 파멸시키실 것이다. 이것이 악인에게 공포가 되는 것처럼, 의인에게는 위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시며, 그들에게 이처럼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윌리엄스(G. Williams, 1636).
14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약속을 따르는 것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것과도 같다. 그가 얼음 위를 처음 걸어갈 때는 얼음이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걸어간다. 그러다가 점차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순복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 그리고 그분의 다른 성품들을 더 알아 가게 되고(하나님의 성품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질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분의 성품과 약속을 그의 삶 속에서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이 약해서,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되면 더욱 강한 믿음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고, 여기 기록된 대로 매일 아침 당신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라. 밤이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신 일을 생각해 보고, 그분의 신실하심에 감동하라. 밤에도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말라. 당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얻은 축복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채우시는지 자세히 주의하여 살펴보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음속으로 확신하기까지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만족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라. 다윗처럼 당신의 마음을 경계하라(시 42편).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더욱 깊고 넓은 믿음으로 인생의 긴 경주를 달리게 될 것이다. -윌리엄 거놀.
14절.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불행한 환경에 처한 자들을 특별히 보살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고아를 도우시는 자"라고 부른다. 교회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며 그분께 나아갔다.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호 14:3).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지혜로워서 실수하는 법이 없고, 신실하셔서 속이는 법도 없으며, 불쌍히 여기셔서 그분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능력이 많으셔서 원하신다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실 수도 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하나님은 이 세상의 군주처럼 자신의 이기적인 뜻을 따라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자비로운 아버지의 선하심을 따라 다스리신다. 그분은 절대 능력과 이해할 수 없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한하신 선을 보이기를 가장 기뻐하신다. 그분의 다른 모든 특성들은 그분의 '선하심'에 뒤따르는 것이다. -스티븐 차녹.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는 것을 보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용납하지 못하는 순결한 눈으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보시고, 죄인을 징계하시고 공의를 행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을 감찰하시는 목적이 바로 이것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보셨다고 묘사했다:"주께서는 보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무엇인가? 그분은 악인의 모든 악한 행위와 가난한 자를 압제한 그 모든 행위를 보셨다. 또한 악인이 하나님을 향해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한 것도 보셨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13절). 시편 기자는 이 헛되고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신다고 말하는가? 주께서는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셨다고 했다. 이렇게 감찰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라고 했다. 그들이 원한을 품고 잔해를 행한 것을 보신 하나님은 마침내 때가 되면 공의롭게 갚아 주신다.
하나님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시다. 그분은 상과 벌을 주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보시고 걸음을 살피신다는 것을 알고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권고를 들어야 할 것이다:"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 11). 오직 우상만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손이 있으나 징계하지 못한다. -조셉 캐릴.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세상에서 가련한 자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형제들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자들을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무장시키시고 내분을 일으켜 서로 상대방을 치게 하시며, 자기들이 가진 막대기로 서로 매질하게 하신다. 그들 당대에 그들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셔서 재산을 탕진하거나, 그들의 후손이 재물에 날개를 달아 날아가게 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셔서 그들로 재산을 쓰도록 하되,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롭게 쓰도록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혜로운 자의 권고를 들어야 한다:"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전 10:20). 성도들은 좋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자를 향해서 원한을 품고 공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며 또한 심판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압제자를 심판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압제자를 향한 모든 불만스런 마음을 버리기에 충분하지 않는가? -에드워드 마베리.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행동과 걷는 길을 바라보시는데, 당신이 행하고 있는 일을 다시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길을 고려해 보지 않겠는가? 이 점만은 기억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길을 고려하여 당신의 말과 행동을 바꾸든지 아니 바꾸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분명 바라보신다는 것이다. 당신이 죄악된 길,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길을 바라보고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정 이 일을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작은 악을 보고서도 용납할 수 없는 순결한 눈을 가지셨다. 그분은 당신이 저지른 저질스런 악, 당신이 걸었던 부정한 길을 보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다윗은 "주께서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갚으려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길, 그들의 압제와 불의, 그들의 혹독함과 음탕함, 그들의 분노와 악의를 보시고 그들을 미워하시고 추적하시고 보응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더럽고 구부러진 길을 감찰하실진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롭고 의로운 길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셉 캐릴.
14-18절.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그분은 가장 약할지라도 가장 선한 자들과 함께하기를 좋아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하신다. 사람들은 양쪽에 분쟁이 일어나면 어느 쪽에 설지 결정하지 못한다.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가를 묻지 않고, 어느 쪽이 더 강한가를 분명히 보기까지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중립을 지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고려할 사항 중에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 명분을 가졌느냐는 것 외에 또 달리 고려할 요소가 있다면, 어느 쪽이 더 약하냐일 것이다. 그분은 강한 쪽과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한 쪽과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외로운 자의 도움이 되시고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는다"(호 14:3). 고아란 부모가 없는 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모든 자를 말한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요 14:18)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아무 도움도 없이, 아무 위로도 없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너희가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과 같으나,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리라.
사람들은 바다로 녹아들어가는 구름과도 같을 때가 많다. 그들은 부자에게 선물을 보내며, 강한 자를 도와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른 땅에 비를 내리시고,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다······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사 25:4). -조셉 캐릴.
16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이러한 확신과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투시력을 갖고서 시실리의 릴리바이움에 있으면서도 카르타고 항으로 카르타고 함대가 들어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했다. 사람이 바다 건너편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멀리 있는 물체를 바라보고 말할 수 있다니!(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즐거워했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을 가진 자들은 릴리바이움에 서서 오랫동안 항해한 배가 소원하는 항구에 안전히 들어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먼 훗날 있을 축복이 마치 지금 도착한 것처럼 보면서 즐거워한다. -앤드류 보나.
17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믿는 자의 겸손한 모습이 기도에 나타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뵈올 때에 우리는 자신의 악함과 죄성을 깨닫고, 우리가 받고자 하는 자비와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또한 욥은 이렇게 말했다:"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 6). 이러한 태도는 기도하는 데 합당한 태도이다.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손에서 무엇인가 받을 줄로 생각지 말아야 한다(약 1:7)! 하나님은 빈 그릇을 채우기를 원하시며,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시편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을 보게 되는가. 이런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항상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시 9:12).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 10:17). 진실로 겸손하게 된 자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기에 합당한 마음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우리는 "나는 가난하고 곤고하오니"라고 기도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특별히 소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시편에는 고난 중에 드리는 메시아의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2, 4, 6). 그리스도도 하나님을 경외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고, 그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신 바 되었다. 이처럼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자 끊임없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마 8장). -토머스 굿윈.
17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겸손한 자는 영적인 기도를 드린다. 기도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며, 이는 겸손하게 해야 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우리가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갈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스 9:6). 가련하고 곤고한 자가 그를 지으신 조물주의 발 아래 엎드리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높이 올라간다. -토머스 왓슨.
17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이러한 특권과 하나님의 자비가 '기도로 얻다'라는 구절과 함께 우리 손에 주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로버트 레이턴.
17절. "겸손한 자의 소원."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드린다. 소원이란 우리의 영혼과 같고 기도할 때에 하는 말은 육체와 같은 것이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과 같이 우리의 소원이 담기지 않은 기도는 죽은 기도이다:"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하나님은 말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들으신다. -토머스 왓슨.
17절.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택하시고 함께하신다. -로버트 레이턴.
17절. 티끌에 가장 가까이 앉은 자가 하늘에 가장 가까이 앉은 자이다. -앤드류 그레이(Andrew Gray, 1616).
17절. "여호와여······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기에,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기도는 쇠사슬을 풀고(행 16:25, 26), 쇠문을 열며(행 12:5-10), 하늘의 창을 열고(왕상 18:41), 죽음의 문을 부순다(요 11:40, 43). 사탄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세 가지 이름을 가졌다. 악한 의도를 나타내는 용, 교활함을 나타내는 뱀, 힘을 나타내는 사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기도 앞에서는 아무 효용이 없다. 가장 잔혹했던 하만의 악의는 에스더의 기도 아래서 침몰당했고, 가장 꾀가 많다는 아히도벨의 계교는 다윗의 기도 앞에서 시들었고, 애굽의 강력한 수천 명의 군대는 아사의 기도 앞에서 겁쟁이처럼 도망했다.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1599-1676).
18절.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가난한 자의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그 원통한 것을 갚아 주실 것을 부르짖는다. 이 하나님은 과부의 재판장이요,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이시다. 가난한 자들은 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 가난한 자에게 불리한 법을 만드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좋은 법을 막아서고 흠집을 내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께서 당신을 방문하실 때에 무엇을 하려는가? 그분은 가난한 여자의 눈물을 들으실 것이라 했다. 그분은 압제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세상의 재판관들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실 것이다.
캄비세스(Cambyses)는 위대한 황제였다. 그의 휘하에는 장관들이 많았고, 또한 보좌관들도 많았다. 이 사실을 나는 역사 책에서 오래 전에 읽었다. 그 황제 아래 있던 사람 중에 뇌물을 탐하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는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가난한 자들에게서 뇌물을 받았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고자 하는 아버지의 열망에서였는데, 옛말 중 "마귀에게 가는 아버지의 아들은 행복하다"라는 말과 같았다. 그에게서 어려움을 당했던 한 과부의 울음이 황제의 귀에 들렸고, 황제는 그 재판관을 속히 죽여서 껍질을 벗겨 재판관의 자리에 깔았다. 그리하여 후에 재판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모든 재판관은 그 재판관의 껍질 위에 앉아서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재판관의 껍질은 모든 재판관들에게 훌륭한 기념비가 되었다. 이러한 기념비가 영국땅에도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잔인하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말했다고 하겠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찾아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 찾아오신다. 첫번째 방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 첫번째 방문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두번째 방문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두번째 방문을 하실 때는 심판이 임한다. 재판관의 껍질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들려주면서 첫번째 방문은 임한다. 이 이야기를 무시하면, 그분은 분노와 심판과 함께 두번째 방문하신다. -휴 래티머(Hugh Latimer, 1480-1555).
18절. "세상에 속한 자." 시 8편은 시작과 끝이 같다:"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편에서 우리는 눈을 돌려 위와 아래, 어디를 바라보아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 자신을 보았다. 시편 기자는 모든 인류를 겸손히 낮추며 이렇게 질문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시 9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시 9:19, 20). 이제 시 10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은 그 배열 순서를 따라 앞으로 진행하면서 우리의 오만함을 버리도록 그 힘과 강도를 더해 간다. (1) 우리는 "사람"이며 "인자"라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혈통과 후손의 번식에 대해 가르친다(시 8편). (2) "사람에 대한 지식"을 말하여 우리의 잘못된 양심과 경험이 우리를 책망함을 알려 준다(시 9편). (3) "세상에 속한 자"를 보여주어 우리가 원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보여준다(시 10편). 시 22편에서는 사람에 대해 수치스러운 내용이 더해진다. 시편 기자가 처했던 상황을 묘사한 것이든,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이든, 사람을 더 낮은 위치로 표현했다:"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 모든 인류의 조상이 타락했기에, 후손으로 태어난 형제와 자매들은 벌레와도 같이 된 것이다. 옛말에 이런 표현이 있다.
처음에는 사람
다음에는 벌레
그리고는 썩음과 혐오
사람이란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이 되지 못한다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자신을 낮출 대로 낮추어서, 자신이 원래 무엇으로 만들어진 존재인가를 고백했다:"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자들 중에서, 또는 혈육으로 아담의 후손이 된 자들 중에서 이와 달리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존재하며,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존 킹.
18절. "세상에 속한 자."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흙에서 살고 있다. -토머스 윌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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