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편
[개 요]
주제-찰스 시미언(Charles Simeon)은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이 시를 요약했다:“시편은 여러 가지 체험적인 지식이 담겨 있는 풍성한 보고와 같다. 다윗은 생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갖가지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천상으로부터 내려온 듯한 아름다운 표현으로 그의 마음을 묘사한다. 또한 그가 고난을 당하거나 즐거움을 누릴 때에 곁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의 감정과 행위를 소개한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성도들은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같은 경우를 다윗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을 때 그는 자신을 미워하여 그의 생명을 취하고자 하는 사울에게서 ‘산의 새처럼’ 추적을 당하고 있었다. 그의 소심한 친구들은 다윗이 잡힐까 염려하며 숨기에 좋은 산으로 도망하여 사울의 진노를 피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이 강건하여 이처럼 무기력한 방법을 쓰라는 권고를 일축해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짤막하지만 아름다운 이 시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시에 “견고한 자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 본다.
구성-이 시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절 다윗이 겪은 유혹.
4-7절 용기를 지키게 된 논리.
[강 해]
1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2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이 구절들에는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시험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다윗이 사울의 궁전에 있었을 때, 그가 도망하면 왕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거나, 겁쟁이라고 누명을 쓰게 될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을 때에 그에게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대적들의 위협을 피해 도망하라고 권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느헤미야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도 이와 같은 시험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그들의 말대로 도망했다면, 그는 덫에 걸렸을 것이고, 그들은 그를 비난할 근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도망하랴?"라고 했다. 다윗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하며 물러서기를 거부했다.
사탄이 우리를 오만하게 하여 넘어지게 할 수 없을 때에는 불신으로 우리를 파멸시키려 한다. 사탄의 계략은 얼마나 교묘한 것인지! 그는 우리와 가장 친한 친구를 움직여서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고 한다. 사탄이 펼치는 논리는 그럴 듯하여 우리가 확고하게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으면, 위험스러운 일이 닥칠 때마다 겁이 많은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도록 만든다.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다윗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악인은 활을 당겼고, 화살은 시윗줄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새야, 새야, 날아가 도망쳐라! 도망가야 안전하다. 지금 곧 서둘러라. 조금만 늦어도 죽고 말거야!" 다윗은 이 충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이 말은 그의 영혼에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굽히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위험을 당할지언정,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다윗을 둘러싼 위험은 분명 심각하고 급박한 것이었다. 그의 원수들은 그를 향해 비밀스럽게 화살을 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또한 사울의 불의한 통치 아래서 공의와 율법이 기초부터 흔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에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그는 위험에서 벗어났고, 원수들이 쳤던 덫에 걸리지 않았으며, 그를 둘러싼 불의에 대항할 수가 있었다.
3절. "의인이 무엇을 할꼬." 다윗이 이 질문에 답을 한다면 "의인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고?"라고 역으로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원수들이 아무리 잔혹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고, 믿음으로 약속의 실현을 받았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도망을 가야 하겠는가? 물매와 작은 돌만을 가지고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자를 물리쳤다.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에게서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또한 사울 왕과 그의 앞잡이에게서도 분명히 구원하실 수 있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는 것이다. 전쟁하는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정복하는가는 알지만 어떻게 도망하는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4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5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다윗은 자신이 용기를 잃지 않고 어디에서 힘을 얻는지, 그 위대한 근원이 무엇인지를 선언한다. 그는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하나님에게서 보호를 받고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했다. 성도들의 하나님은 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높은 산의 정상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위험스러운 골짜기와 전투가 벌어지는 평원에도 계신다.
4절.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이 지구상 어디를 가더라도 머리 위에 하늘이 있듯이, 우리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가까이 계신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꾀임에 빠지지 않게 된다.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근거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그 아들의 간구를 항상 들으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꾸미는 계교를 예수께서 어찌 모르시겠는가? 사탄은 밀 까불 듯이 우리를 농락하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성전에서 기도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믿음을 잃겠는가?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시는 악인의 계교가 있겠는가? 그분이 거룩한 성전에서 그 아들의 희생 제물을 기뻐하시는데, 그분께서 악인들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지 못하시겠는가?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분은 절대 통치자시다. 하늘이나 땅에서, 그리고 지옥에서도 그분이 명하시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일은 없다. 그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통치자시다. 우리가 어디로든지 도망갈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왕 중 왕을 신뢰한다면,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겁쟁이처럼 도망가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분은 우리의 여호와 닛시! 그분께 경배를 드리자. 그분의 이름을 우리의 깃발로 세우고, 도망가지 말고 승전가를 높이 부르자.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은 결코 졸지 않으신다. 그분의 눈은 주무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신다.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KJV에는 "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라고 번역되었다. "안목"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프아프"<p[p[>인데, 이는 '눈꺼풀'이란 뜻이다-역자 주.) 그분은 인생들의 말과 생각들을 세밀히 조사하신다. 사람이 미세한 사물을 조사할 때에는 눈꺼풀을 거의 닫아 눈을 가늘게 뜨고 다른 물체가 보이지 않도록 하듯이, 여호와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처럼 자세히 살피신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살피시되 마치 이 우주에 그 외에는 다른 피조물이 없는 것처럼 철저하게 살피신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우리에게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온전히 바라보시며,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지켜보신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는가? 우리의 사기를 꺾으며 우리에게 도망가라고 하는 말을 일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분은 내가 처한 모든 위험을 아신다. 그분은 또한 나의 연약함과 한계도 아신다. 내가 오직 그분만을 의뢰한다면, 그분이 나로 망하지 않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안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소심한 새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에서 도망해야 하겠는가?
5절.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KJV에는 "여호와는 의인을 시험하시고"라고 번역되었다. "감찰하시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바한"<@jb>인데, 이는 '시험하다'라는 뜻이다-역자 주.) 여호와는 의인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시험하실 뿐이다. 그들을 너무 귀하게 생각하셔서,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연단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자녀로서 시련을 당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도 이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시련이란 많은 축복을 얻기 위한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참된 기쁨이라네
나의 기쁨은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네
구세주의 능력을 알고서
세상에서 상실한 것들로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네.
시련은 약속의 감미로움을 알게 한다네
시련은 기도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그분의 발 아래 엎드리게 하고
나를 낮추사 그분의 발 아래 거하게 한다네.
이곳에서 어떤 시련도 겪지 않는다면
인생길을 걷는 동안 아무런 징계도 없다면
이것은 진정 두려워해야 할 일이라네
버림받은 자식에게는 징계도 없기 때문이라네.
사생아, 잡종, 이런 자들이 매를 피한다네
세상의 헛된 쾌락에 빠졌기 때문이라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이렇게 해서도 안 되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네.
-윌리엄 카우퍼(1731-1800).
시련이 축복을 얻는 통로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시련을 피해야 하겠는가? 시련을 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축복을 피하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내가 왜 이러한 악인들에게서 피해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신다면, 내가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하만은 왕의 호의를 잃기 전에 왕궁에서 지극히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왕이 그를 미워하자 그 앞에서 두려워 떨던 사람들이 담대하게도 그를 교수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의 이마에 찍힌 검은 표를 보라. 우리가 그들을 피해 도망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자와 다투신다면, 그 결과에 회의를 품는다거나 싸움에서 도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6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의 비를 맞고서 멸망했다. 모든 악인들이 이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그들은 곡과 마곡처럼 힘을 모아 전투를 벌이겠지만, 여호와께서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겔 38:22)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태우는 바람"이라는 표현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타는 듯이 메마르고 숨막히는 바람을 암시한다고 하기도 한다. 로스는 이것을 "불타는 폭풍"이라고 했고, 다른 저명한 주석가는 "분노의 바람"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표현을 따르더라도 이 구절은 공포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폭풍이 일 때에 그들이 이것을 어찌 견딜 것인가! 지옥에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의 머리 위에 쏟아지는 불과 유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너희 반역의 무리들아,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불길이 너희들을 휘감을 것이다. 지옥의 공포가 너희들의 기업이 되고, "너희 잔의 소득"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영원히 그 잔을 들이키게 될 것이다. 지옥에서 마시는 고통의 한 방울도 공포를 자아낼 것인데, 잔 가득히 마시면 그 극심한 고통을 어찌 견디겠느냐? 이 땅에 사는 동안 진정 이것을 생각하라. 지옥에서는 비극과 고통의 잔을 마시되, 한 방울의 자비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제 곧 지옥 불에서 불붙을 장작과도 같은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면, 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종말, 그 두려운 최후를 생각해 보라. 그리하면 그들의 위협을 당해 품었던 두려움은 멸시로 바뀌고, 그들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는 그들을 연민하며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다.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마지막 구절에는 악인의 운명과 대조적으로 정직한 자의 운명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우리가 두려움으로 시달리지 말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시련을 피해 도망가도록 유혹하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나타나 있다. 의로우신 여호와께서 의로운 자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의인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임무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품상 그 일을 좋아하신다. 그분이 의로운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분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분이 의로우셔야 한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상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므로 시련을 당할 때,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라. 의롭게 행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면, 사람이 나를 대적한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우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숨길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인을 관찰하시고, 인정하시고, 기뻐하신다. 그분은 의인들 안에서 자신의 형상, 그분이 스스로 새겨 놓으신 그 형상을 발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을 만족해 하시며 좋아하신다. 우리가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악을 향해 손을 벌려야 하겠는가?
우리는 인생의 곁길이나 지름길을 버리자. 그리고 여호와께서 웃으시며 우리의 가는 길을 비추어 주실 바른 길을 걷자. 우리는 등불을 등경 아래 두고자 하는 유혹,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의 종교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숨기고자 하는 유혹을 받지는 않는가? 우리에게 십자가를 버려두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피해서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없는가? 우리를 유혹하는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자. 믿음의 성장을 꾀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대적하고, 아들께서 받으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서 여호와를 따르자. 재물과 육체와 마귀는 모두 우리 귀에 속삭일 것이다:"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그러나 우리 모두 도망가지 말고 담대히 그들에게 대항하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는 피할 곳도, 피할 이유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라. 내 영혼아, 네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해서 전진! 앞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앞으로 갓!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46:7, 11).
[주해와 설명들]
시 11편 전체. 아미랄두스(Amyraldus)는 이 시를 기록하게 된 상황에 대해 가장 그럴 듯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다윗이 사울의 궁정에 있을 때, 왕이 다윗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다윗을 핍박하기 시작한 때에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의 친구들, 또는 우정을 가장한 자들은 왕이 그에게 호의를 보일 때까지 잠시 동안만 산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으라고 했다. 다윗은 비록 후에 이 권고를 받아들인 듯하지만, 그 당시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는 성도들이 세상의 핍박을 당하고, 세상과 타협하라는 세상 사람들의 유혹을 받을 때에 세상의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것을 교훈한다. -윌슨(1860).
시 11편 전체. 이 시는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였을 때에 기록되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죽인 후에 에돔 사람 도엑은 사울의 명령을 따라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다(삼상 22:18). 지식은 백성을 보존하고,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키는 것이다(호 4:6; 말 2:7). 그러므로 제사장을 대량으로 학살한 이 사건은 종교의 기초를 흔든 지진과도 같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머스 풀러.
시 11편 전체. 이 시는 전체적으로 롯을 소돔에서 구원한 사건과 놀랄 만큼 일치하고 있다. 천사는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으며, 롯은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창 19:17-19)라고 했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의 대응 구절로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창 19:24)가 나타난다. 또한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의 대응 구절로서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7, 8)라는 구절을 생각할 수 있다.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A.D. 560>, John Mason Neale's Commentary on the Psalms, from Primitive and Medieval Writers, 1860).
시 11편 전체. 트레이시멘 호수에서 전투를 벌이던 군인들은 전투에 몰두하여 어느 편도 땅이 흔들리는 지진을 느끼지 못했다.
땅을 흔들던 지진은 아무도 모른 채 사라져 갔네
그 누구도 발 밑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느끼지 못했다네.
이 군인들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군인들이었다면 어떠할까? 그들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간절히 바라며 소망 가운데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없다. -앤드류 보나.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사울과 그의 추종자들은 다윗이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으므로 산으로 피해 방랑자나 되어서, 바보 같은 새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껑충거리며 뛰어다니라는 뜻으로 그를 조롱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위로와 안식과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테오도르 하크(Theodore Haak, Translation of the Dutch Annotations, as Ordered by the Synod of Dort in 1618, 1657).
1절.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조롱하는 자가 자신의 산으로 도망하면 도움을 주겠다고 다윗을 멸시하는 말이다. 이 교만한 산에 올라가도 우리는 진정으로 보호를 받지 못한다. -사무엘 호슬리.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성도들이 심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거룩한 믿음과 신뢰를 보이는 모습이다. 앤 아스큐는 스미스필드에서 1546년에 불에 타서 순교했다. 그녀가 뉴게이트에 있을 때 작사하여 부른 노래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신뢰감이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무장을 한 기사처럼
전투에 부름을 받았으니
나는 이 세상과 싸우리라
그리스도께서 내 방패가 되시네.
믿음은 우리의 강한 무기요
그것 없이는 싸울 수 없네
내 원수들이 나를 막아설 때에도
나는 믿음으로 전진하리.
믿음으로 강건해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면
원수들이 많이 몰려올지라도
결국 승리를 거두게 되리.
우리의 조상들도
믿음으로 의를 얻었으니
나도 담대한 마음으로
세상의 고초를 두려워 아니하네.
내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소망이 있는 까닭이라네
그리스도께서 나를 도우시고
내 고초를 담당하시리라.
여호와여, 당신은 나의 주시니
나를 돌아보소서
얽매인 나를 구원하시고
내게 당신의 힘을 보내 주소서.
내 머리털보다
원수들이 더 많나이다
그들로 나를 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주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소서.
그들이 잔인하게 나를 박해하오나
당신께 내 모든 염려를 맡기나이다
그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을 것은
당신만이 나의 기쁨인 까닭이나이다.
난 기우는 배가 아니라네
내 닻을 굳게 내렸으니
흑암처럼 깊은 안개 속에서도
내 배는 안전하다네.
산문으로도 운문으로도
난 글을 쓰는 재주가 없다네
그러나 한 장면을 보이리니
이는 내가 목도한 장면이라네.
내가 보좌를 보았는데
그곳은 공의가 앉을 자리였다네
그러나 공의는 그곳에 없었고
음울하고 잔인한 자가 그곳에 있었네.
미친 듯 밀려오는 홍수에
의로움이 사라져 가네
사탄은 기고만장하여
무죄한 피를 빨아 마시네.
그때 나는 주님을 생각했다네
주께서 우리 모두를 심판하시는 날
이들에게 어떤 심판이 임할지
글로 다 기록할 수 없네.
그러나 내가 사모하는 주여
저들이 내게 행한 대로
그들의 죄악을 따라
그 값을 치르지 말게 하소서.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다윗은 자신을 종종 여러 가지 새들에 비유했다.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으니"(시 102:6).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 102:7). 그는 자신을 비둘기나 메추라기에 비유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이러한 새와 관련하여 표현했다.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6).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삼상 26:20). 어떤 이들은 "어떻게 이처럼 여러 가지 다른 새들이 한 사람 다윗과 비교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렇게 묻는 자들에게는 "어떤 두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듯이, 한 사람이라도 상황이 변함에 따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겠다. 다윗이 통치자로서 다스릴 때에는 독수리와 같았다. 이와 반대로 그가 현상 수배를 당해 쫓기던 때에는 부엉이와 같았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은 당아새와 같고, 외로이 친구가 없을 때에는 참새와도 같았으며, 박해를 받던 때에는 메추라기와 같았다. 이 시에서 다윗은 원수의 입을 빌어서 자신을 일반적인 새로 비유했다:"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이 말은 네가 구원과 보호를 받고자 하는 너의 하나님을 속히 의지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 자체로 좋은 말이고 다윗이 당한 처지를 생각해도 적합한 말인데, 왜 다윗은 이처럼 불쾌해 하고 분노하는 것인가?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는 질문에는 그러한 권고를 싫어하는 격한 마음이 나타나 있다. 다윗은 그 권고의 내용이 아니라 권고하는 태도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에게 그렇게 산으로 도망해 보아도 그가 바라는 바 안전을 찾을 수 없다는 듯이 조롱하는 어투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대적들의 속임수에 빠져들지 않고, 이 시를 시작하면서 여호와를 굳게 신뢰할 것을 다짐한다:"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여기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이 조롱하는 태도로 우리에게 좋은 권고를 주거든, 우리는 그 권고를 받아 행해야 한다. 그들이 조롱함으로 심판을 받는다면 이것은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사람의 육체를 독이 묻은 종이로 싸면 독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좋은 권고는 나쁜 태도로 전달된다 하더라도 독으로 감염되는 것은 아니다. 대제사장들은 우리의 구세주에게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3)라고 조롱했다. 그들이 조롱하면서 말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다. 우리가 사람들의 조롱에 영향을 받아 좋은 권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도, 성경과 천국도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도 유다는 마지막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유 18절). -토머스 풀러.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참되신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미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는데도, 너희 영혼을 꾀는 자들이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실 수 없다는 말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자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 18:2, 3).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존 킹(1608).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며 사탄과 논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시 42편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듯하다:"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 42:11). 그는 영혼이 그 속에서 낙담한 것을 느끼고서, 이것을 치유하고자 마음속으로 논쟁하고 다투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을 느끼고서 그 영혼으로 낙담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라고 했다:"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11). 반면에 이 시에는 그가 낙담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의 대적들이 사탄의 조종을 받아 그를 낙담하게 하려 했으나, 그의 마음에 낙담이 자리를 잡기 전에 그것을 마음에서 쫓아내며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여호와,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마음의 낙담도 피할 수 있다. -리처드 길핀.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옛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서 수치스럽게 구원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처럼 날아가 안식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많은 순교자들이 마치 저녁 식사를 하듯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죽음을 택했다. 고문하던 자들은 블란디나를 심문하는 데 지쳐 버렸다. 율리아누스(Julian) 황제 시대의 어느 귀족은 이렇게 말했다:"오, 황제여! 우리는 정말 수치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신의 잔인함을 비웃고, 더욱 마음을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것을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능력도, 성도들이 무장한 비밀스런 무기도 알지 못했다. -존 트랩.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이 구절에는 무장을 한 교활한 자와 죄가 없는 자 사이에 일어나는 불공평한 싸움이 나타나 있다. 첫째, 악인은 무장을 했다:"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첨단 무기이다. 둘째, 그들은 교활했다:"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이것은 숨어 매복해 있다가 갑자기 활을 쏘아 놀라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우정과 사랑으로 가장하여 가까이 있다가 공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셋째, 공격을 받는 자는 무죄한 자로서 "마음이 바른 자"였다. -토머스 풀러.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체포하고 죽이기 위해 계교를 꾸몄다. 그들이 유다를 매수하여 그의 주님을 배반하게 한 것은 활을 당긴 것과도 같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동원했을 때, 그들은 살을 시위에 먹인 것이다(마 26:59). 우리 주님은 참되고 의로우시며, "마음이 바른 자"이시다. 또한 그의 사도들, 주님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자들도 마음이 바른 자들이다. 주인이 당하는 일을 종들도 당한다. 요셉이 그가 섬기던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모함을 당했듯이,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함을 당하고 있다. -미카엘 아이구안(Michael Ayguan<1416>, Neale's Commentary on the Psalms, from Primitive and Medieval Writers).
2절.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그들은 오이밭에 있는 허수아비처럼, 새들을 놀라게 하려고 활과 화살을 메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나무나 볏짚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다. 그들이 쏘는 화살은 치명적인 화살이며, 그들은 어두운 밤을 틈타서 몰래 화살을 쏜다. 여기에는 잔인함과 교활함이 함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지옥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잔인함과 교활함이 합하여 함께 일을 꾸밀 때, 누가 그것을 저지할 수 있겠는가? 교활함이 기상천외한 방법과 계교를 생각해 내면, 잔인함은 그것을 수행하되 냉혹하게 일을 마무리한다. 교활함은 시간과 장소와 방법과 환경을 조정한다면, 잔인함은 결정적인 행동을 취한다. 교활함이 칼을 숨긴다면, 잔인함은 목을 잘라 버린다. 교활함이 머리를 짜내고 계획을 세워서 매복하고, 훈련시키고, 전략을 세우면, 잔인함은 야수와 같은 심정으로 온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공격을 받으면, 그 놀람과 두려움이 어떠하겠는가! -존 킹.
3절. "터가 무너지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골리앗을 쳐부수듯 쳐부숴야 한다. 이런 질문을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종교의 터'가 무너질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이렇듯 오랫동안 무관심하게 지내셔서 이런 황폐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실까? 그분이 터가 무너지는 것도 보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그분이 '전지'하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다면, 그분의 '전능'하심은 어떻게 되는가? 그분이 보시고, 구원하실 수도 있으나 그럴 의지가 없다면,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마르다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특성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계셨더라면 터가 무너지거나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달리 "교회나 교회의 진실되고 활기있는 각 성도들의 터가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있다:"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둘째, 각 성도에 대해서도 이런 말씀이 있다:"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딤후 2:19).
하나님의 세 가지 특성-전지하심, 전능하심, 선하심-으로 터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정도로 부분적으로 파괴될 수 있다.
첫째, 악인은 악한 욕망을 품고 악행을 한다. 그들이 온 힘을 다해서도 터를 무너지게 하지 못한다면 온 세상이 바라보는 가운데 수치를 당할 것을 생각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둘째, 악인은 헛된 자랑을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터를 무너뜨렸다고 헛되이 믿을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눅 2:1). 그는 천하를 다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럽도 다 정복하지 못했고, 아시아의 일부,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이보다 더 작은 영토를 통치했고, 아메리카는 한 뼘의 땅도 통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게도 온 천하를 다스린다고 선포했던 것이다.
셋째, 겉으로 보기에 터가 파괴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박해받는 교회는 태풍에 시달리는 배에 비유할 수 있다. 태풍이 불면 배는 그 모든 돛을 내린다. 바람이 세게 불면 이것을 잘라 버리기도 한다. 그때는 조그마한 돛도 올릴 수 없고, 어떤 배도 항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배를 항구에 들여가 단단히 묶어서 태풍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한다. 그러나 태풍이 지난 후에는 사람들이 돛을 높이 올리고서 다시 항해를 한다. 이처럼 교회도 핍박이 있을 때에는 그 모든 즐거움과 매력을 잃어버린 듯하고, 새로운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기를 꺼린다. 교회에 핍박이 있을 때는 마치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복한 날들을 허락하실 때에는 가장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즐거워한다. 넷째, 하나님의 종들 중에서 지도자들이 체포당하고 순교를 당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이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수도 있다. 엘리야도 고난을 당했을 때에 이렇게 불평했다:"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토머스 풀러.
3절. "터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이 구절을 조건을 나타내는 구절로 이해하려고 하여,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경우를 가정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위로를 얻고자 하지만, 이것은 두 가지를 생각해 보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 불가능한 것을 가정하면 결과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께서는 실제로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예로 들었을 것이다. 둘째,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는 '한다면'이라는 가정을 나타내는 단어 "임"(ma)이 아니라 '하기 때문에'라는 원인을 나타내는 단어 "키"(yk)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다윗이 살고 있던 시대에 이러한 슬픈 상황이 이미 일어난 것을 말하는 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대비하는 것이 좋은 법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불가능한 것을 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자. -토머스 풀러.
3절. "터가 무너지면."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자들이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여 안일하게 살거나, 적극적으로 살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에 반대 의견을 보이고자 한다. 다윗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다윗은 우리가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과 기뻐하심을 따라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면 성도들로 심한 고난을 겪게 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능력으로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이에 대한 나의 설교는 장례식의 설교처럼 세 가지 슬픈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슬픈 상황-"터가 무너지면." 둘째, 슬픈 질문-"의인이 무엇을 할꼬?" 셋째, 슬픈 대답-무너진 터를 다시 세우는 것에 대해서 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토머스 풀러.
3절. "터가 무너지면." 한 국가나 민족의 터는 법률과 헌법이다. 백성들의 합의가 이루어진 질서나 권력이 그 나라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이런 경우, 지혜로운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 나라의 터가 없다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경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시의 4절에서 그 해답을 알 수 있다:"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시편 기자는 이런 혼란한 와중에서 이렇게 말한 듯하다:"저희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시 82:5).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길을 지키신다. 그분이 계시던 곳에 지금도 계신다. 그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조셉 캐릴.
3절. "의인." 의인 한 사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의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터가 무너진 시대에 함께 살고, 힘을 합한다고 해도 무너진 터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풀러.
3절. "터." 이것은 먼저 확정된 것들을 말한다. 본문은 지붕이 무너진다거나 벽이 부서진다고 말하지 않고, '터'를 말하고 있다.
3절. "터가 무너지면." 터는 복수형으로 쓰였다(히브리어 성경에는 "터들"이라고 복수형으로 쓰였다-역자 주). 나는 건축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구절이 의심 없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한 건물이 서로 가까이에 있는 여러 개의 터들(기둥으로 생각된다)에 세워질 수 있다. 그것들 중에서 하나가 무너진다면, 그 건물을 지탱해 주는 다른 터들로 인해서 그 건축물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서 있거나, 잠시 동안이나마 공중에 매달려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터들이 다 무너진다면, 그 건물이 그대로 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토머스 풀러.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적법한 것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악인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 그들의 양심은 너무 관대하여 무엇이나 허용하기 때문에 사실상 양심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사람을 찌른다거나 독살한다거나 대량학살을 하는 등 불법적인 일을 행하고,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 자를 처치해 버린다. 의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행동의 기준이 있어서 그 기준을 감히 넘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은 무엇이든지 행한다:"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롬 3:8).
3절. "무엇을 할꼬." 시편 기자는 "무엇을 생각할까?"라고 말하지 않았다. 억압받는 사람이라도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이다. -토머스 풀러.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죄인들이 죄를 짓는 시간은 성도들이 기도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며 기도했고, 그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통곡했다(스 9장). 예레미야도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라"(렘 13:17)고 했다. 때로는 사람들의 죄악이 넘쳐서,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골방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타락과 죄악을 인하여 곡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런 국가적 혼란을 직접 목도했다. 우리 정부의 기초가 파괴되고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을 때 "의인이 무엇을 할꼬?" 그렇다. 이런 때는 오직 '금식하며 기도'할 뿐이다. 사람들이 타락하여 사람의 힘이나 정책으로 구원할 수 없을 때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이런 때는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하나님은 하늘의 성전에 계신다는 말씀은 이처럼 혼란스러운 때에는 그곳에 계신 하나님께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는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이 기도는 우리 가난한 나라가 다시 부해지고, 혼란스러운 정부에 질서를 회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윌리엄 거놀.
4절.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정확히 아신다. 그분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바라보아 아신다:"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이 표현은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는 데서 빌려 온 은유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보려면 눈꺼풀을 가늘게 하고 눈을 뜬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는 무심코 보시는 것이 아니다. -스티븐 차녹.
4절. "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하나님은 사람이 찾는 것처럼 찾지 않으시고, 그 앞에서 숨겨진 것을 찾듯이 찾으신다. 그분이 감찰하시면 숨길 수가 없다. 그분은 마음을 보시고, 심장을 감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세히 살펴보신다:"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드러나느니라"는 헬라어로 "테트라케일리스메나"(tetrachlismevna)인데 이는 '해부하다', '분해하다'라는 뜻이다. 그분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부분까지도 자세히 보시는데, 마치 해부된 모습을 처음 보듯이 지극한 흥미를 가지고 바라보신다. -리처드 알레인(Richard Alleine, 1611-1681).
4절.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는 것을 보시되 그 끝까지 살펴보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분은 무심코, 일상적인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주의를 기울여 당신이 행하는 모든 행동의 이유와 동기와 그 결국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신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의 눈은 불꽃 같고"(계 1:14)라고 했다. 불이란 무엇인가를 찾을 때 사용하는 것이며, 무엇인가 순수한 것을 만들고자 할 때는 불에 던져 넣어서 순수한 것과 찌꺼기를 구분해 낸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과 같아서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신다. 그분은 당신이 순수한 의무를 감당하는 중에도 형식적으로 행하고, 위선이 섞여 있으며, 생명력이 없는 것도 다 아신다. 그분은 당신이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연막을 치는 것도 아신다. 당신이 마음의 변화도 없이 겉모습만 꾸미고 사람들을 속일 때에도 주님은 아신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겉으로 치장한 무화과 잎사귀들을 꿰뚫고, 당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시는 것이다. -에스겔 홉킨스(Ezekiel Hopkins, D.D.).
4절.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항상 하나님을 의뢰하라. 하늘은 지옥을 내려다본다. 하나님은 당신을 대적하여 어떤 계교를 꾸미는지 어느 때고 말씀하실 수 있다. -윌리엄 거놀.
4절.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범죄자, 또는 어떤 사건에 대해 고소를 당한 자가 법정에서 심문을 받기 전에 판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라고 명한다:"나를 바로 쳐다보면서 말하라." 죄를 지은 자는 대개 자신의 눈을 가리며 말한다. 죄책감으로 머리를 들 수 없는 것이다! 악인은 인상이 험악하거나 똑바로 위를 쳐다보지 못한다. 재판관이 그에게서 눈길을 피하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이 시에는 하늘과 땅의 재판장 되신 여호와에 대해 이런 표현이 있다:"그 눈꺼풀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재판관이 범죄자를 보면서 그의 얼굴에 쓰인 악한 성품을 읽듯이,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악인을 바라보신다. 요한계시록 6:16에는 모든 죄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바라보시는 것도 견딜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신다. 악인들은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도 견디지 못한다. 하물며 공의의 눈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마음에 숨겨진 죄의식을 얼굴에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얼굴에 죄의식을 나타낸다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조셉 캐릴.
5절. "여호와는 의인을 시험하시고."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죄로 인해서 많은 고난을 겪는다. 우리는 낙원에 사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살고 있으므로, 고난에 고난을 연이어 겪는 것이다. 다윗이 사자를 만나고, 그 후 곰을 만났으며, 그 다음에는 거인을 만나고, 거인을 만난 후에는 사울 왕을 만났고, 그 후에는 블레셋 사람을 만났던 것처럼, 성도들도 빈곤과 싸우고, 그 다음에는 질투와 악평과 험담과 싸우며, 그 다음에는 질병과 싸우게 된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영적 전투를 벌이는데, 이는 마치 항상 일에 쫓기는 노동자와 같다. -헨리 스미스.
5절. "여호와는 의인을 시험하시고."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 악한 것에서 보배로운 것을 구분해 내고, 거짓 선생으로부터 진실된 선생을 구분해 낸다. 박해는 성도들을 구분해 내는 시금석이 된다. 이것으로 사람이 어떠한지, 그가 은이나 금인지 아니면 찌꺼기인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실체인지 그림자인지, 영적인지 육적인지, 진실한지 위선자인지 구분해 낸다. 다른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이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도 고난과 추적과 박해를 받을 때에 과연 그가 진실된 자인지 구분할 수 있다. 불 같은 시험 중에 견고히 서는 자는 그 마음이 충성스럽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토머스 브룩스.
5절. "여호와는 의인을 시험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이 구절에는 정반대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악인을 미워하시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인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신다. 그러므로 시험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같은 말이다. -C. H. S.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하나님은 먼저 그물을 내려 치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면, 불과 유황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피할 수 없다.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면, 그는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물에 걸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받고 넓은 곳에서 지내기 위해 부르짖어야 한다. 악인은 의인을 잡기 위해 그물을 친다. 하나님은 이것을 막으시고 성도들의 영혼으로 덫을 피하게 하시든지, 덫을 끊으시고 의인을 구원하신다. "올무가 끊어지고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 우리 자신의 죄만큼 우리를 옥죄는 덫은 없다. 우리의 죄악은 우리의 머리를 숙이게 하고, 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어두운 그늘이 없는 양심을 가진 사람은 평안히 안식을 누린다. -사무엘 페이지(Samuel Page, 1646).
6절.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올가미로 사냥하는 사냥꾼이 사냥감에 올무를 던져 머리나 발을 묶듯이,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위로부터 공포와 포위와 결박을 내리셔서 포로로 잡아가신다. -C. H. S.
6절.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마른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예기치 않고 한창 즐거워하는 시기에 그물을 비처럼 내리신다. 또한 악인이 좋은 것을 바라며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진노를 쏟아부으신다. 그분께서 잠시 연기하실지라도, 비는 반드시 내린다. -윌리엄 니콜슨(William Nicholson, 글루체스터의 주교, David's Harp Strung and Tuned, 1662).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 어느 날인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분명히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왜 그 악한 사람에게 부와 권세를 주어 악행을 하게 하셨는지, 그 수수께끼도 풀릴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부와 권세를 부러워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영원히 멸망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닌가? 그때가 되면 그들이 오만하게 누렸던 그 모든 부귀영화에 대해 설명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들을 잘못 사용한 만큼 그들이 받을 저주도 무서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누렸던 이 모든 특혜가 하나님의 자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물"이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고,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을 내리신다고 했다. 그분께서 세상이 탐하는 것들, 부와 명예와 쾌락을 흩어 버리시는 날, "그물"을 내려 치실 것이다. 그들을 불러 그들의 모든 행적을 국문하실 때, 그분의 진노로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도 내리실 것이다. 다이비즈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쾌락을 즐기며 살았지만, 지옥에 떨어졌을 때에는 타는 듯한 그의 혀를 서늘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도 구할 수 없었다(다이비즈는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를 지칭하는 이름이다-역자 주). 아브라함은 그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고 했다. 여기에는 뼈아픈 냉소가 들어 있다. 이 세상에서 헛된 것들을 탐닉하는 자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지! 너는 좋은 것을 받았으니, 이제는 고통도 당하는 것이다! 아! 다이비즈의 자주색 옷과 맛있는 음식을 좋은 것인 줄 알고 탐닉하지 말라! 이것들이 결국에는 큰 고통과 고뇌로 끝난다는 것을 알라! 자주색 옷을 휘감고 지내다가 마침내 불꽃을 휘감게 되는 것이 좋은 일인가? 맛있는 것으로 배불리 먹으며 도살의 날을 위해 살찌우는 것을 부러워하려는가? -에스겔 홉킨스.
6절. "그물······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심판이 내려진 후에는 저주가 따른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이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물"을 악인에게 내려 치는 것은, 사탄의 유혹을 받는 것이 결국 그들에게 임할 최악의 심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노의 불과 유황과 폭풍이 교만의 바람,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응하는 심판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라고 했다. 이것을 시편 기자의 말과 비교해 보라:"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시 16:5). -카시오도루스, Neale's Commentary on the Psalms, from Primitive and Medieval Writers.
6절. "저희 잔의 소득." 이 표현은 손님들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풍습과 관련이 있다. -윌리엄 프렌치와 조지 스키너(William French and George Skinner, 1842).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광이 없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은 있음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은혜를 입지 않은 채 영광스러운 그분과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서 아무런 은혜를 베푸시지 않은 채 그분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의로우신 여호와는 의로운 것을 좋아하시고, 그분은 정직한 자를 대면하여 보신다. 그분은 미소를 머금고 의인을 보시지만, 의롭지 않은 사람은 호의를 품고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부정한 피조물과는 교제를 나누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주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속성상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변하든지, 죄인들의 속성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각각 독립된 두 인격체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한 쪽의 속성이 다른 쪽의 속성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늑대와 양, 어두움과 빛은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죄인인 그대로 남겨 둔 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그분의 의지가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 부정한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부정한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룩한 존재로 남아 있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기에,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스티븐 차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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