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편
[개 요]
주제-이 시가 기록된 상황에 대하여 다윗의 생애에서 특정한 사건이나 시기와 연관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기록된 상황을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님의 연단을 많이 겪은 사람이 기록한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련 가운데 처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시이다. 독자들이 이 시에 나타나는 감정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상황을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를 “어느 때까지의 시”라고 제목을 붙이곤 했다. 이 시에는 “어느 때까지”라는 단어가 자주 나타난다.
구성-이 시는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2절 염려 중에 하는 질문.
3-4절 부르짖는 기도.
5-6절 믿음의 노래.
[강 해]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 2절.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 질문은 여기에서 네 번이나 나타난다. 이것은 마음의 극한 고통과 구원받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여기에 조급함이 함께 나타나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도 때로는 이렇게 조급해지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조급함으로 변해 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 불평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우리가 슬픔에 가득 차서 더 이상 다른 소리를 외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는 이 소리를 들으신다. 우리가 이렇게 부르짖는 중에도 성령께서는 우리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을 지피시기 때문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아! 우리 영혼이 안에서 낙담이 될 때에 하루는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면
순간 순간이 왜 이리도 느리게 지나가는지
시간은 왜 이처럼 지체하는 것인지!
우리가 인생의 여름을 맞이했을 때, 시간은 그 나래를 활짝 펴고 날아간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이 되면, 시간은 고통스럽게 날개를 퍼득거릴 뿐이다. 감옥에 갇혀 벽을 바라보며 지내는 한 주간은 자유의 몸으로 지내는 한 달보다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슬픔을 견뎌야 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죄악이 많다는 것을 증거할 수도 있다. 금을 용광로에 오랫동안 두는 때는 그 안에 태워 버려야 할 찌꺼기가 많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으며,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게 된다.
1절.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아! 다윗은 왜 이처럼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잊으신다고? 전지하신 그분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여호와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를 잊으실 수 있다는 말인가? 아!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런 생각을 품지 말자. 그리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자:"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4-16).
"영영히" 잊으셨다고?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잊으셨다고 의심하는 것은 정말 나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결코 하지도 말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영영히 버리셨다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분은 하룻밤 동안 잠시 진노하시지만, 그분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이것은 앞에 나온 질문보다 훨씬 더 지성적인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숨기시면서도, 우리를 기억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숨기셨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잊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이 얼굴을 숨기신 것은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에게는, 아버지께서 얼굴을 피하신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분이 다시 미소를 짓고 나타나시기까지, 우리는 결코 안식할 수 없다.
2절.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이 구절의 원어에는 그의 마음속에 경영하는 것을 '쌓아 둔다'라는 뜻이 있다. 그가 여러 가지 방법을 쌓아 둘 만큼 수없이 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우리도 다윗과 같은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여러 가지 방법을 궁구해 보지만, 우리가 당한 곤경에서 피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쓰라린 경험이다. 고난을 반추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린아이들이 쓴 약을 삼키지 않고 반항하며 씹는다면, 그 아이의 입은 쓴 맛으로 가득할 뿐이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서 낙심될 때, 악한 원수들은 즐거워한다. 이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원수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는 우리의 귀를 슬픔으로 울리는 것이다. 마귀가 우리의 슬픔으로 기쁨의 축제를 벌일 때, 우리의 인내는 고갈되고 우리는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그분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을 네 가지 면에서 살펴보았다. 시편 기자의 슬픔은 네 가지 면에서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 내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 그리고 원수들이 자긍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슬픔이다. 우리는 모두 최악의 상태를 가정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무덤에 묻고 묘비를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것으로 기념비를 세우려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애가는 네 권이나 기록하면서, 아가는 한 권만 기록하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슬픔으로 통곡하는 것에 더 익숙해 있지는 않는가?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다윗은 이제까지 슬픔으로 인해 탄식했으나, 이제는 파수꾼이 새벽을 알리듯이, 목소리를 높여서 기도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밀물과 썰물이 바뀌고, 우는 자는 눈물을 거둘 때가 되었다. 속죄소는 절망을 묻고 소망을 회복하는 장소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우울한 생각이 아직도 다윗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에 그는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라고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회의가 자신에게 임한 재앙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제거해 주실 것을 부르짖었다.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은 지옥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잠시나마 회의를 품었던 그는 지옥의 주변에까지 접근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생각'하고 '응답'하실 것을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을 기도했다. 우리가 비참한 지경에 빠졌을 때에 도움을 구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이 부르짖음에는 믿음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시련과 슬픔을 당해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천국은 우리의 확실한 기업이며, 우리는 영원히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여호와여, 내 믿음의 눈을 밝게 하소서. 그래서 어둠 가운데서도 나의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내 눈을 크게 뜨고 원수들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내 마음의 눈을 밝히사 올바른 길을 보게 하소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오, 여호와여! 간구하옵나니 어두움을 밝히소서!" 우리는 여러 면에서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빛을 받아야 한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어두움은 잠을 부르고, 의기소침은 곧바로 눈을 무겁게 한다. 우리의 마음이 기진하고, 절망 가운데 눈이 어두워져서 사태를 확실히 보지 못할 때, 한걸음 앞에는 사망의 깊은 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당하는 시련이 그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두려움을 당해서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 우리가 깊은 슬픔에 빠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간구하는 기도를 들으시며 은혜를 부어 주신다. 마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시편 기자는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세를 향해 품는 소망과 즐거움으로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무서움으로 죽음을 바라보았다.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우리는 원수들의 잔혹함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 영혼의 원수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원수들로 자랑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잃거나, 함께 얻는 것이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들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들이 잠시 동안 우리를 놀리고 비웃는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날이 되면 우리를 멸시하던 그들이 멸시를 당할 것이다.
5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기쁨을 다시 회복했다! 이제 비가 그치고, 새들이 노래하는 시기가 도달했다. 속죄소에서 우는 자는 마음의 기쁨을 회복하고, 목소리를 높여서 다시 노래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신음했다면, 이제는 그와 함께 춤을 추자. 다윗은 슬픈 일을 당해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시를 시작했다가, 이제 노래하면서 시를 마친다. 그는 때로 즐거움으로 노래하며 시를 시작했다가 탄식하며 마치기도 했다. 그래서 피에르 물랭(Peter Moulin)은 이러한 시들이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두 사람이 지은 것을 합쳐 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태풍이 분 다음에 찾아오는 고요함이 더욱 즐거운 것처럼, 슬픔 뒤에 찾아오는 기쁨이 더욱 큰 것이다.
과거의 슬픔을 기억하면
오늘 누리는 기쁨은 더욱 감미롭다네.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다시 다짐한다. 지난 수년 동안 그는 여호와로 그의 피난처를 삼고 살았다. 그분께서 지금도 난공불락의 산성 뒤에서 미소짓고 계신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졌고, 이 믿음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면, 그래서 마음의 창이 닫혀 있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추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믿음이 활동하게 되었다. 믿음의 활동이 있는 동안 우리는 결코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산토끼나 참새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는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움직이면, 우리는 그 있는 곳을 곧 알아내게 된다. 원수들의 모든 공격도 시편 기자를 그 산성에서 떠나게 하지는 못했다. 파선당한 배의 선원이 그 돛대를 붙들듯이, 다윗은 그의 믿음을 붙들었다. 그는 여호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릴 수도 없었고, 버리려 하지도 않았다. 아! 우리도 그의 본을 따르자. 우리의 생명을 다해서 믿음을 지키자.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제 믿음이 내 영혼 속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자.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종들이 기쁨의 종소리를 울리는 듯하다. 영광스러운 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내 안에서 기쁨의 축제를 벌인다.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노래는 참으로 감미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마음의 노래에 합하여 입술의 찬송이 나타난다.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다윗은 목소리를 합하여 내면의 축제에 화답한다. 그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고 다짐하는 것과 같이, 입술과 혀로 영혼과 함께 노래한다.
내가 날마다 당신을 찬양하리니
당신의 분노가 사라졌음이니이다
피 흘리는 어린양으로부터
평안한 마음이 흘러 넘치네.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여······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라고 탄식하며 이 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생각을 떨치고 그분이 그를 "후대"하셨음을 노래하며 시를 마친다. 우리도 잠시 동안 인내하면 이와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조급하여 말로 불평을 토했지만, 곧 기쁜 마음으로 이를 정정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후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진실된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되 결코 영원히 떠나지는 않으신다. 성도들이 받는 시련이 지리하고 오래 계속될 수는 있어도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잠시 동안 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조만간에 성도들을 회복시키신다. 이때에 누리는 기쁨은 지난 날에 겪었던 슬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 54:7). 여기에는 버린 후에 다시 모을 것이라는 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있었던 상처를 씻을 "큰 긍휼"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떠나실 수가 없다. -티모시 크루소(Timothy Cruso, 1696).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 고난이 극에 달하게 하여 그들로 시련을 거치게 하신다. 그분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이 힘을 다해 노를 젓게 하신다. 그리고 밤 사경이 되어서야 오시는데, 이는 아침이 다 된 시간이다(막 6:48). 우리는 고난을 싫어한다. 그래서 고난을 받기 시작하면 연단을 충분히 받았기에 구원받을 때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가 충만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연단을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신다. -조지 허치슨(George Hutcheson, 1657).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면 그 이유를 알아보라. 우리가 그분으로 진노케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결코 이유 없이 진노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그분으로 얼굴을 돌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의 명령 중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수행하지 않아서 그분이 매를 드셨는가?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슨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오리 바람처럼 심판하시는지 계속해서 물어야 한다. 그분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처럼 오랫동안 진노하시고,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가?
우리는 슬픔으로 곡하며 사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이처럼 흑암으로 덮으시고 우리로 낮이나 밤이나 그분의 진노 아래 고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행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이 왜 이처럼 진노하시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런 고난의 이유와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때로 즐거운 일이다. -티모시 로저스.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신데, 그분이 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눈을 잠시라도 돌리신다면, 어미 닭이 병아리를 돌보지 않을 때에 독수리가 덮치듯이 우리의 영적 원수는 우리를 잡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달려들 것이다······아버지는 때로 아들의 성품을 알기 위해 아들을 시험한다.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것을 감당해 내는지, 아니면 불평하는지, 아들이 자기 고집대로 하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가 그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가 그를 난폭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망을 가거나 아버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께 반항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시고, 돌보지 않는 것처럼 내버려두기도 하시면서 성도들이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시험하신다. 시련을 당할 때에 성도들이 그분을 계속해서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다고 해서 그들도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는지, 하나님이 잊으신 듯할 때에도 해야 할 의무를 다 감당하는지, 하나님께서 돌보거나 보호하며 공급하지 않으시는 듯할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이런 것들을 보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은 재앙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왕하 6:3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재앙을 당해서도 그분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그분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하자:"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 30:18).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법은 사무엘이 사울을 대했던 것과 같다. 사울이 위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에도 사무엘은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았다(삼상 13:8, 9). 사무엘이 사울 앞에 나타나지 않을 때 사울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그분의 성도들을 이렇게 대하신다. 그분은 종종 성도들에게서 오랫동안 얼굴을 숨기시며 그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시험해 보신다. 다윗이 고난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셨던 것처럼, 성도들이 고난에 처했을 때 그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이시며 이러한 때에 그들이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고자 하신다. -토머스 가테이커(Thomas Gataker, 1637).
1, 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질병은 말을 타고 와서 발로 걸어 나간다"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이것은 모든 악한 것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이 갑자기 넘어진다거나 과식하여 죽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처럼 질병은 쉽게 오지만 고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이와 반대이다. 기쁨은 소처럼 천천히 오지만 사라지기는 쉽다. 슬픔이란 집에 오래 머무르는 손님이고, 슬픔이 더 많을수록 더 오래 머무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알기에 슬픔을 온화하게 대할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저 대문에 서서 마실 것을 요구하고 떠나간다. 그러므로 기쁨에게는 별 신경을 쓰지 않겠다. -조셉 홀.
1, 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고통의 강도는 우리의 용기를 시험한다. 그러나 고통이 지속되는 기간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우리는 고통의 강도 때문이 아니라, 고통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것 때문에 지쳐 버린다. 고통이 임할 때에 처음에는 온 힘을 다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그러나 고통이 지속되면 마음이 해이해지고, 마침내 낙담하게 된다. 욥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여러 가지 시험을 꿋꿋하게 견디어 냈다. 그러나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이 고통 가운데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앤드류 풀러.
1-4절. 생명이 떠나가면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변한다. 그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도 사라진다. 생명이란 즐거운 것이다. 이것은 감미롭고 편안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창백한 것이고, 어느 곳에나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분의 호의가 떠나고, 그분이 얼굴을 숨기실 것을 두려워한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때면 그들은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고통과 환난을 느끼며 몸을 떠는데 이는 사망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 -티모시 로저스.
1, 5, 6절. 기도는 은혜를 증가시키고 자라게 한다. 운동이 몸에 유익을 주는 것처럼, 기도는 영혼에 유익을 가져온다. 기도 운동을 통해서 영혼의 방해물들을 소화하거나 떠나게 한다. 몸을 잘 움직이지 않는 자는 감기에 걸리고, 폐에 가래가 끼며 마침내는 천식에 걸린다. 그러나 신체적 운동을 하는 자는 몸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유지한다. 기도는 성도들의 운동장이며, 이곳에서 은혜를 누리게 된다. 바람이 공기를 순환시키는 것처럼, 풀무로 아궁이의 숯불에 바람을 불어넣어 불길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찌끼를 불어내는 것처럼,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한다.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간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무디게 한다면, 세상에서 부딪히는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약하게 한다.
크리스천들이 나아갈 은혜의 보좌가 없었다면, 이처럼 믿음을 약하게 하는 것들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시편 기자가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기 전에는 두려움과 회의로 가득 찼으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린 후에는 하나님과 감미로운 교제를 나누고 안식을 누리는 것을 보게 된다(시 13:1). 그는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기도를 시작했다:"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그러나 그가 기도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수행한 후에는 의심이 사라지고, 안개가 흩어지며, 강렬한 태양처럼 믿음을 회복한다:"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3:5, 6). 이처럼 그는 믿음으로 곧 축제가 있을 것을 바라보며 준비한다. 이전에는 하나님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에 잠겼으나, 이제는 믿음이 강해져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즐거워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오십 명으로 시작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성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의인의 수를 열 명으로 낮추었다. -윌리엄 거놀.
1, 6절. 하나님을 섬기다가 낙심되는 일이 일어나거든, 결심을 새롭게 하고 더욱 용기를 가지라. 한 가지 낙심되는 일로 물러서지 말라. 하늘 나라를 향해 폭풍처럼 돌진하라. 부모들은 때로 자녀들이 자신들을 더 찾는 것을 보고자 하여 숨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처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들어주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으셨으나, 여인의 끈질긴 간청에 그녀가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셨다:"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지속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고통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만난다면, 오랫동안 인내한 보상으로서 충분하지 않겠는가? 복권을 자주 사는 사람이 스무 번이나 아무런 상을 타지 못하다가, 마침내 큰 상에 당첨된다면 그 만족함이 지극히 크지 않겠는가. 당신이 지속적으로 스무 번, 아니 마흔 번이나 문을 두드리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그 응답을 받고, 죽은 후에는 당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 큰 상을 얻는다면, 그 모든 기도의 수고가 무한히 보상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응답을 하시기까지 기도를 쉬지 말라. 이 시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면서 위로를 받으라. 이 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시작했으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끝을 맺었다. -조지 스윈녹.
2절.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성도들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 시를 읽고 위로를 받으며 약해지는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다(요 5:5). 어느 여자는 18년 동안 불구가 되게 하는 영에게 잡혀 있다가 풀려났다(눅 13:11).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에 나오는 나사로는 평생 동안 질병과 가난 아래서 고통하다가 죽음으로 이 모든 고통에서 풀려나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눅 16:20-22).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불평과 같은 말로 불평하고자 유혹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도우실 것,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윌슨.
2절.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때, 우리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로 인한 죄의식과 비참함은 없는지 상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하는데도, 이것을 행하지 않고 위로만 받으려고 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윗도 이런 경우에 처한 듯하다. 그는 굉장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경우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무엇을 해야 하며, 이 모든 일의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매일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마음으로 기뻐했다. 오늘날 고난에 처한 사람들 중에도 다윗의 행동 중에서 앞 부분만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다윗의 행동 중에서 뒷 부분도 따라야 할 것이다. -앤드류 풀러.
2, 4절.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고난을 당해 비참해진 자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면 큰 위로가 된다. 우리를 도울 수는 없지만 우리의 슬픔을 진정으로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약간의 위로가 된다. 그들은 우리의 상처를 다 치료하지는 못하지만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곤경에 처한 자를 사람들이 놀리고 욕하면, 이는 그가 지고 있는 십자가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더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상처를 더 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우레의 아들들이 되어서 그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한다면, 이것은 진정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고통 없이 편안한 사람들에게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심하게 대하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홧김에 내뱉는 말이 고난 중에 있는 자의 영혼에 깊이 찌르는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들이 불평할 때에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안다면,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불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수가 되셨다는 것을 느끼는 자들은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가 어느 장소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자비로운 친구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은 고난 중에서도 큰 위로가 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티모시 로저스.
3절.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질병과 슬픔으로 고통을 당할 때는 눈이 침침해지고 무거워진다.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이 현상은 더욱 심해지는데, 마침내 죽음이 다다르면 어두움 가운데 눈이 닫혀 버린다. 이와 반대로 건강과 기쁨은 눈을 환하게 하고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마치 내부로부터 눈에 '빛'을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질병을 고치고 슬픔을 거두어서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거룩한 즐거움으로 영적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육체의 회복은 사망의 잠에서 구원받는 것이고, 영혼의 회복은 죄의 잠에서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조지 혼.
3절.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여호와여,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나이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서 살 자가 없다고 하셨나이다. 아! 여호와여! 나로 죽음을 당하게 하소서. 내가 여호와 뵙기를 소망하나이다. 당신을 뵈옵고 나로 죽게 하소서.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고 죽기를 바라나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뵙고자 하여 죽기를 소원하나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자 나는 내 생명을 멸시하나이다. -어거스틴.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아! 주께서 숨으심은 나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이다. 내 하나님이여! 당신의 보화를 숨기심은 나로 그것을 더욱 소원하게 하려는 것이나이다! 당신께서 진주를 숨기심은, 찾는 자로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하려는 것이나이다. 당신이 즉시 주지 아니하시고 지연시키심은, 나로 계속해서 간구하도록 가르치고자 함이니이다. 당신이 듣지 않으시는 듯이 보이는 것은, 나로 인내하게 하려는 것이나이다. -안셀무스(Anselm, 1034-1109).
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멸시를 견딜 수 있겠는가?
파멸시키고자 하는 자의
독살스런 혀를
속된 무리들의 저질스런 욕설을
똑같은 행동이라도 당신이 성공하기만 하면
쏟아붓는 아부하는 말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승리감에 도취한 경쟁자의
조롱하는 눈빛을
악의에 찬 기쁨을
그리고 멸시가 담긴 동정을.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 1700-1748).
4절.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내 비극으로 만들어진 희극. -존 트랩.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믿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승리 앞에서 기뻐한다. 환자는 운동을 할 때 잠시 동안 피곤하고 아프지만 기뻐한다. 이렇게 하여 건강을 회복할 것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은 그것들이 즐거운 일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은 즐거워하며, 선한 일을 이룰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승리를 거둔다. 믿음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보지 아니하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할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함께하시는 것을 바라보게 한다. -존 볼.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비록 욕정이 우리의 육신을 소유한다 해도, 인내로 우리 영혼을 소유하게 하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전쟁을 벌이지만 우리의 모든 고난은 끝이 나고, 우리의 승리는 영원할 것이다. 다윗은 승리를 노래한다:"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시 18:38-40). 가난한 자들은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밟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복하려던 자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잠시 동안 밟고 지나갔지만, 마침내 우리가 그들의 목을 영원히 밟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겸손히 인내하고 확실한 소망을 품었던 자들은 상을 받을 것이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하나님께서 추적하시는 때가 되면 병거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고, 말의 빠른 속도로도 도망갈 수 없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 20:8). 그들이 믿던 것이 그들을 속인 것이다. 그들은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셨다. 우리가 다시 일어선 것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바로 서기 위한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믿음으로 사는 자처럼 기쁨으로 사는 자들은 없다. -매튜 헨리.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 말하노니 믿음으로 살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항상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바는, 당신이 우울하거나 사탄의 방해로 기쁨과 영적 쾌활함을 잃어버리고, 우울하고 침울한 삶을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떠한가? 믿음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염려를 맡기고,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버리고, 마음에 있는 모든 악한 생각과 욕정을 비우고,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이 강심제를 가지고 있다 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군인처럼 칼을 찼어도 공격할 때에 그것을 빼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이 우울해질 때, 믿음으로 "내 영혼아, 왜 불안해 하느냐? 네가 누구를 의뢰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두세 마디 한다면 곧 안식을 누리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주님께서 바람과 폭풍을 꾸짖으시고, 풍랑이 이는 당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시지 않겠는가? 다윗이 수금을 탔던 것처럼, 누구나 우울증과 악한 영을 쫓아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유쾌한 사람들과 지내면서, 어떤 사람들은 한 잔의 술을 즐기면서, 또 다른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우울한 마음을 달래며 살아가려 하지 않는가? 이것들을 하루라도 거르게 되면, 그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정신이 몽롱한 채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아침에 해장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과 대조해 볼 때, 이러한 삶은 정말 어리석은 삶이다. -사무엘 워드(Samuel Ward, 1577-1653).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믿음이란 사람이 시련을 당할 때에 그가 과거에 체험했던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와 성실하심을 기억하게 하여 그 영혼으로 쓰러지지 않게 한다. 시편 기자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이렇게 해서 견딜 수 있었다. 믿음은 이렇게 말한다:"아! 하나님께서 당신의 겉 사람과 속 사람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 기억해 보라. 그분은 당신이 고난을 당할 때에 당신의 육신을 지키셨고, 또한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암울한 상황에서 당신을 구출하셨고, 당신과 언약을 맺으셨고, 당신을 위해 선을 베푸셨다. 그분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도우셨고, 여러 번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보셨다. 그분은 무서운 구덩이와 빠져들어가는 늪에서 당신을 건지시며, 당신의 입에 새 노래를 주시고, 다시는 두려움이나 믿음 없는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도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지 못하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니, 이 어찌된 일인가? -존 윌리슨(John Willison, 1680-1750).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존 필폿(John Philpot) 씨는 런던 의 주교의 석탄 저장소에서 얼마간을 지낸 후, 주교의 부름을 받고 불려 나갔다. 주교는 여러 가지 심문을 하던 중, 그들이 이런 나쁜 환경에 처했다면 탄식하고 슬퍼해야 할 터인데, 왜 감옥에서 노래를 부르며 그처럼 즐거워했는지를 물었다. 필폿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우리는 시편을 노래하며 이렇게 즐거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고, 시와 찬미로 서로 화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둡고 불편한 장소에 갇혔으므로 서로 위로하는 것이랍니다. 저희들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바울은 누구든지 마음이 바른 자는 시편을 노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극 가운데 있지만,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한답니다." 몇 마디를 더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석탄 저장소에 끌려왔지만, 여기에는 여섯 명이 함께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쾌활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엘싱(Elsing) 부부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고, 내가 옥에 있는 동안 그들이 돌봐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 주십시오. 여기 석탄 저장소는 매우 어둡지만,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자들에게는 여왕의 궁전보다 이곳이 더 사모할 곳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세상은 이처럼 극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처럼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서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불행을 경사스러운 일로 바꾸어 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을 믿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있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체험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을 믿으시고, 세상이 여러분에게 행하는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 몸을 구속할 때, 우리 영혼을 자유케 하여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땅에 내동댕이치면, 그들은 사실 우리를 지극히 높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인다면, 우리에게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 선하신 하나님이시여! 내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큰 자비를 베푸시나이까? 이날은 주께서 만드신 날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이 길은 좁은 길이나,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하고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아! 내가 곧 처형을 당한다니, 내 마음은 기쁨으로 뜁니다! 하나님, 내가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하시고, 이처럼 큰 영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용서하소서. 내 비록 어둡고 탄식하는 장소에 있으나, 탄식할 수 없는 것은 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기쁨으로 충만하며, 이전에는 결코 이처럼 기쁨을 누린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영원히 찬양을 받으소서. 우리 원수들은 이것을 보고서 초조해 하며 이를 간답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 기쁨을 더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이나 물 앞에서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 Mirrour, 1671).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 시편의 끝은 시작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존 트랩.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위기를 당할 때마다, 사탄이 나를 해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지 못했다. 내가 두려운 일들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붙드시고 격려해 주셨다. 그러나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괴롭힘을 받지 않게 하시고 성경의 여러 말씀으로 이 모든 것들을 당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래서 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면, 더 많은 위로를 얻기 위해서 더 큰 고난을 주실 것을 기도하겠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참조. 전 7:14).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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